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것을, 가장 소중하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또, 한사람 한사람이 가장 하고싶어 하는 일도 모두 다르겠지요. 오늘은 오마이뉴스의 ‘제국주의의 치어걸, 누가 미화하는가‘라는 글에 배알이 꼬여 한마디 해보기로 했습니다.
글은 주로 박경원이 친일 행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체신장관 고이즈미의 권력에 의해 청연을 가지게 되는 과정과, 그것을 이용해 일본의 하늘에서 일본을 위해 날았던 여러 가지 정황이나 역사적 사실을 적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글의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해서 알아본 바는 없습니다.
단, 누가 그녀의 비행을 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지독한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만일 그녀가 체신부장관에게 비행기를 받지 않았으며, 그의 권력에 기대지도 않았고, 일본의 하늘에서 일본인들을 위해 날지도 않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녀는 과연 비행을 할 수 있었을까요. 비행을 하지 않았다면 그 시대에서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요. 그녀는 결코 그 자리에 설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모국은 물론 일본에서조차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 시대의 그저 그런 한 사람으로 살아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광용의 꺼삐딴 리를 좋아합니다.비록 필자는 글중에서 이인국 박사를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지만, 저는 이인국 박사의 삶은 그 시대에서 자신의 삶을 가장 잘 꾸려나간 사람의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분명 그는 친일 인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자신과, 그의 가족의 행복을 지켜냈습니다. 누가 그의 행동을 욕할 수 있습니까.
같은 논리로 한 사람이 그 시대에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C)코리아 픽쳐스
동감합니다.^^ but…. 청연이 태풍을 이어 올해 한국영화 3대 악재에 들어간다는 미확인된 소문이 – _-)a
일단, 예고편이 참 맘에들어서 꼭 볼 예정인데, 영 배알이 꼬이는 글을 봐버려서 기분이 나빠졌어요 ;_;
“한 사람이 그 시대에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시대 나름이고, 꿈 나름이고 과정 나름 아닐까요. 박경원이나 이인국의 친일행위라봐야 대단한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일제시대에 “고등계 형사가 될테야” 같은 ‘꿈’을 가지고 독립운동가들을 열심히 때려잡는 ‘과정’으로 이뤘다면… (덜덜덜)
일단은 그 시대의 친일 행동이라는게 작게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크게는 분명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는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지독한 개인주의’라고 적어봤어요. 흠.. 분명 그런걸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꽤 고민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지독한 개인주의’를 고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감입니다… 오마이뉴스 등에서 보고나서 웬지 기분이 꾸리꾸리 했던 이유가 이글을 읽고서야 명쾌하게 이해되네요.
그렇다고 영화에서 박경원 씨의 인생이 지나치게 미화 내지 왜곡되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지만… 일단 영화를 보고 판단하렵니다.
역시, 영화를 본 다음에 곰곰히 생각해봐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화’되었다는게 문제라고 생각함. 그녀 개인의 삶에 대해선 확실히 네가 지적한 부분이 맞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름다운 것인 마냥 ‘영화화’했다는 것이지. 그리고 아직 영화가 개봉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일련의 과정을 ‘미화’한 것은 분명할테고. ‘친일 행적을 미화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할지는 모르나, ‘친일 행적’이란 고리타분한 말을 쓰기 이전에, 그녀가 일본 정계 고관에 ‘빌붙었다’는 것을 가린 것은 분명하니까. 만인에게 보여지는, 만인에게 보이려 하는 영화는 분명 지켜야할 ‘공공성’이라는게 존재한다고 생각함. 특히 그것이 대중영화라면 더욱더.
일단, 제 생각은 위의 글에서 대체로 읽으셨을테니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 두고, 영화나 소설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봅니다. 영화나 소설은 그것이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사상이나 가치관이 녹아들어야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신문 기사나 다큐멘터리가 되겠지요. – 물론 신문 기사가 사실에만 기초하는 것은 아니지만. – 영화에서 그녀의 행정을 미화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미화는 소설이나 영화의 표현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영화가 대상을 미화하는 것이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기준에서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영화를 본 사람 개개인의 가치관과 사상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적인 영화라 할지라도 공공성의 이전에 영화가 가질 수 있는 표현의 자유로움이 바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시대의 ‘누구나 노력해서 진출할 수 있는’ 여성이 아니라 그시대의 ‘보통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가려한’ 여성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해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 여성조종사는 치어걸이나 기생처럼 치마입고 교태부리는 것이 주업이 아니라 분명 기술을 익히고 연습하는 전문직이었으니 친일만 한다고 그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겟죠. 여성조종사의 지위를 얻기위해 노력하고 존재한 그녀의 부분을 친일이었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지워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시대에 던져진 그녀가 역사적으로는 친일이라고 기록될 행적을 밟지 않았다면 정말로 완전히 역사 속에 지워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요. 민족적인 관점에서 그녀가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사실 이전에, 그녀는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아간 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 – 그것이 어느 나라의 국민이든 간에 – 에게 기억된다면, 그것으로도 일단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민족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해석은 그 다음의 일이겠지요.
글쎄요….저는 꺼삐딴 리를 작가와 같은 시각으로 읽어서 그런지, 글의 내용이 많이 불편하긴 하네요.
밀피유님같은 생각이 우리 사회의 다수를 반영하기 때문에, 소설 ‘광장’에서는 ‘남쪽에는 광장이 없고, 다들 자신만의 안락한 집 속에 틀어박혀 있다’고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쓰면서 ‘분명 많이 얻어맞겠구나’ 하면서 썼습니다. 분명 반대의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많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우선 자신이 있고, 자신의 집이 있고, 그 다음에 광장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장이 자신의 집을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의 집을 보호하고, 자신은 자신의 집을 나가 광장에 서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그 이전에 자신은 자신의 집으로 존재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광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나 공공의 안녕 이전에, 자신과,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돌아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뒤늦게 영화를 구해서 봤다. 어찌되었건 그것을 이용한 자들과 그녀의 행적을 분리할수도, 도맷금으로 볼 수도 없겠지.. 그저 착찹한 기분이랄까, 그렇다고 어느정도 미화된 영화의 스토리에 올라타고 싶은 생각도 없고.. 광장은 있는데, 들개떼가 광장을 집어삼켰거늘.. 그 누가 광장에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고 안온한 집안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뛰쳐나와 팔을 치켜 든 사람들덕에 광장을 되찾은것도 아닌데..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 때문에, 혹은 들개떼에게 이용당했다고 매도당하는건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뛰쳐나와 싸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아이덴티티(?)을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사실도 생각나는군.. 그저 복잡한 심경.
그저, 그 시대에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는 주의환기와 나름 열심히 살았고 실력이 있었으니 그나마 선전에 ‘이용’이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볼 뿐…. 과연 그녀가 그렇게 행동했던것이 ‘결과적’으로 옳았는가에 대한 판단은 우리세대에서도 이른것이 아닐까?
한가지 덧붙이자면, 과연 ‘이용’ 당했는지 ‘이용’했는지는 본인이 알고 있었을테고, 나중에 객관적인 자료들이 입증하겠지, 오락영화에 대고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닌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