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처리기사 실기시험.

몇 년 전에 정보처리기사 시험을 봤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필기와 실기로 구분된 시험은 실기는 외워서 보는 분위기였고, 실기는 ... 외워서 보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다른 시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필기나 실기 할 것 없이 모두모두 지독하게 행정편의주의에 입각한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필기 문제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보다는 특정 지식을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데이터베이스 정규화에 대한 문제가 나오면, 정규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않아도 됩니다. 각각의 스탭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만 알면 됩니다.

실기 시험을 보러 갔다가 처음에 완전 긴장했습니다. 준비~ 땅~ 하자마자 다들 문제를 읽어볼 것도 없이 키보드부터 다다다닥~ 두드리는데, 그제서야 문제를 좀 읽어볼라 치니 완전 긴장되더군요. 남들은 벌써 문제를 다 읽고 코드 작성 들어가는데, 아직 코드 에디터도 안 열었으니 말입니다. 앞사람들 모니터를 보니 수십번은 해본 듯 문제 창과 코드 에디터를 화면 상하에 반반씩 차지하게 배치해 놓고 있었습니다. 제 시야에 보이는 수십 개의 모니터가 다 그렇게 되어 있더군요. 여튼, 실기시험 문제는 자료를 정렬하고 조건에 맞는 레코드를 추출하고 뭐 그런 걸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쪽 역시 몇년 동안 문제가 전혀 바뀌질 않아서 아무것도 몰라도 코드만 달달 외워 가면 볼 수 있었습니다. 학원 출신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한 40분 지나니 다 풀고 나가더군요. 한 50% 정도의 사람들이 그렇게 빠져나가자 시험장 안에는 키보드 소리 대신 시험이 뒤적거리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

얼마 전에 회사사람 한 명이 정보처리기사 필기를 봤다고 합니다. 필기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합격했는데, 이제 실기를 공부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클베가 코앞이니 공부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실기 시험 문제라고 들여다보는걸 뒤에서 보니 문제 형식이 바뀌었더군요. 갑자기 궁금증이 생기길래 실기 문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봣습니다. 헌데, 새로 바뀐 실기는 이게 실기인지, 필기의 연장인지 알 수 없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벌써 몇 해 동안이나 이렇게 바뀌어 진행 되어 왔나봅니다.

실기 시험이라는 건 대강 순서도에 빈칸 채우기, 디버그 시트 - 제시된 변수에 프로그램의 각각의 스탭 마다 무슨 숫자가 들어가는지를 채우는 시트 - 채우기, 전산 영어  빈칸 채우기 같은 시험문제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다들 객관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주관식도 한정된 범위 내의 숫자만 쓰면 되도록 만들어져 있어 귀찮게 채점 프로그램의 입출력 형식에 맞춰 출력을 조절할 필요도 없고, 시험지 나눠주고 보는 필기랑 똑같이 보면 되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실기에 특정 언어나, 프로그램 환경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환경에서 공부한 사람들을 모두 어우를 수 있어 보였습니다.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 시험볼 때 델파이로 시험보러 오신 분이 시험 시작 이후에도 델파이를 인스톨하고 계셨던 걸.

그런데말입니다. 실기 시험 문제를 검색해보고 나서, 회사 사람이 구입한 실기 서적의 기출문제와 예상문제를 읽어보다가, '이걸로 괜찮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엔지니어 인터뷰에서는 종종 종이에 코드를 써 보도록 한다고 합니다. 종이에 코드를 적는 일은 꽤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뷰는 완벽하게 정확한 코드를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의사 전달이 확실히 된다면 일정 수준에서 의사 코드의 형식을 빌려도 되는 거죠. 난수를 뽑는다면 그냥 'random(1 ~ 10)' 이런 식으로 써도 상대는 이해할 겁니다. 하지만 새로 바뀐 실기시험에서는 간단한 순서도이지만 남이 만든 코드 - 여기선 순서도 - 를 해석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똑같은 정렬 코드도 사람에 다라 조금씩 다른데, 출제자가 만든 정렬 방법을 이해해 두지 않으면 시험에 상당한 난항을 겪게 될 겁니다.

만일, 이렇게 다른 사람의 코드를 해석하는 과정을 시험의 일부로 생각했다면 좋은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던 시험을 수성 사인펜을 굴리도록 바꾸기 위해 이렇게 만들었다면 이 시험은 그냥 돈 내고 쓰레기 하나 - 자격증 - 얻어 오는 시험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출문제란에 있던 순서도를 보고 디버그 시트에 숫자를 채워 넣는 문제를 풀어보다가, 잠깐 울화통이 치밀었습니다.
2007/04/07 23:46 2007/04/07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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