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16 00:18
기획자
어느 작업자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원인은 기획자에게 있습니다. 그래픽이 구리면 그건 기획자가 그래픽 작업자에게 충분한 기획서와 설명을 제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에 버그가 많고, 전체적으로 설계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건 기획자가 프로그래머들에게 차후 수정될 부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임이 재미 없다면, 이건 빼도박도 못하고 기획자 잘못입니다. 반대로 게임이 잘 되면 기획자는 중간은 갑니다. 훌륭한 그래픽 효과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래픽 작업자들은 연일 인터뷰에 시달리고, 훌륭한 확장성과 뛰어난 퍼포먼스를 갖춘 다루기 쉬운 서버 개발자들은 다른 회사로부터 강렬한 스카웃의 유혹에 시달릴 겁니다. 게임이 재미있으면 회사는 돈을 벌겠지만, 기획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기획자에 대한 험하지만 맞는 이야기들이 오가길래, 95% 변명에, 5% 자아비판을 담은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아마 중간중간에 주제가 바뀔거에요.
기획자는 왜 개발새발 나불거린 좆병신같은 기획서 하나 던져놓고 가끔 와서 얼마나 됐냐고 묻는 짓거리밖에 못 하는가. 사실, 이 질문을 하기 전에, '왜 기획자가 일정마저 챙기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합니다. 게임 개발자 구직 사이트의 카테고리 분류를 보면, 기획자는 기획자랑, QA랑, PM이랑 짬뽕되어 있습니다. 아. 하나 빼먹었네요. 시나리오. 각각의 업무는 꽤나 다른데, 특히 QA와 PM은 그래픽 작업자도 프로그램 작업자도 하기 싫어하니까 그냥 기획자들이 대충 총대 매는 것 뿐, 저걸 기획자가 하면 당연히 작업을 말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기획자는 일정을 관리해서는 안됩니다. 일정을 관리하는데는 굉장히 많은 고려할 점들이 있고 기획자가 일정을 담당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기획은 지구 반대쪽으로 날아가버립니다. 일정도, 프로세스도 관리해야 하는 마당에 좆병신같은 기획서가 나와도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혹시 기획자가 어슬렁거리며 '작업 어디까지 됐어요?'라고 묻고 있다면 분명히 기획자는 좆병신같은 기획서를 남발하고 있을 거고, 다른 작업자들은 불만에 가득 차 프로젝트는 에베레스트로 기어올라가거나, 타이타닉처럼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중일 겁니다. 그리고 기획자에 대한 분노에 찬 글들이 온 세상을 뒤덮지요.
기획서라면 다른 분들의 말씀 처럼 지나가던 원숭이가 봐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하고, 적어도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잘 하는 기획자라면 보통은 이미 이사나 팀장쯤 올라가 기획서를 쓰지 않거나, 진짜 좋은 회사에 갔을 테니 그런 기획자를 실제로 만나기는 어려울겁니다. 대신, 이해가 안 가는 문장 정도는 찾아가서 물어보면 그럭저럭 알려주는 기획자는 몇 명인가 있겠지요. 문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묻지 않는 경우입니다. 기획서가 중요한 이유는 나중에 게임 기능이 구현되었을 때, 구현 결과가 버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NPC와 대화 중에 아이템 창이 열리는 건 대강 생각해보면 버그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기획서에 'NPC와 대화 중에는 아이템 창이 열리면 안됩니다' 따위로 적혀있다면 저 상황은 버그가 됩니다. 기획자들은 이런 상황을 종종 빠뜨리고, 작업자는 이상한 부분에 대해서 묻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게임은 버그 투성이의 듣보잡이 되고 말지요.
지금까지 만나본 몇몇 작업자 중에서, 용케 일이 만족스럽게 잘 진행됐고, 작업 과정 자체도 마음에 들었던 상황들이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암만 기획서를 이뭐병으로 써도 일이 잘 진행됐습니다. 왜냐면, 기획서가 이뭐병이니까 따지러 오셨거든요. 오셔서 '이게 뭐야 병신아 다시 써' 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우진씨. 나 이거 뭔말인가 모르겠어.'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저는 뭔가 설명하려고 들텐데, 제가 설명하려고 시도하려고 하고 보면 이미 문서에 뭐가 잘못됐는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게 더 나았을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조금 거치면 기획서는 이 기획서를 볼 작업자에게 특화되고, 저나 작업자나 둘 다 기분 좋게 작업할 수 있는 문서가 만들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뭐병급 기획서였지만, 나중에는 작업자 한정으로는 그럭저럭 고등교육을 받고 나면 뭔소린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문서가 됩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기획팀장이 총대를 매고 일정관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PM이라는 직함을 단 자가 팀에 있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하루 종일 온갖 곳의 전화를 받고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 사람이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에 관련된 어떤 작업도 진행한다는 소문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기획팀장이 PM 역할을 했는데, 덕분에 팀장이 게임 기획을 일관성있게 유지하고 이끌어나가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각각의 기획 작업자들은 나름대로 고군분투했겠지만, 전체적으로 게임에는 일관성이 없었고, 당연히 모든 책임은 기획자들에게 돌아왔습니다.
기획자들은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합니다. 아무도 문서화하기 싫어하고, 아무도 의사소통을 하기 싫어하는 상황이라면, 기획자는 프로그램의 구현 상황을 체크해 문서화해야 하고, 그래픽 작업자들의 데이터를 문서화 해서 어디까지 완성되었는지를 관리해야 합니다. 아무도 서로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상황에서는 중간에서 어슬렁거리며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기획자가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기획자를 회사에서 당장 내 쫓아도 되는 전제 조건은 프로그래머와 그래픽 작업자들이 워낙에 우애가 돈독해서 서로 궁둥이로 말해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회사에서 모든 기획자들을 거리로 내몰아도 프로젝트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문서화와 의사소통 같은 부분을 귀찮아서 기획자들에게 맡겨 떠밀어 두고 기획자들이 기획 작업을 할 수 없도록 만든 채라면 이 사람들이 비록 어슬렁거리며 진행 상황이나 물어보는 존재로 보이겠지만, 웬만하면 내쫓아서는 안됩니다.
똥 싸는 기획자가 자주 나타나는 건, 기획자가, 기획자가 아닌 다른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을 좆도 모르면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 관리, 프로세스 관리, 그래픽이나 프로그램 부서의 문서 관리 같은 일들을 좆도 모르면서 하고 있다면, 이 사람들에게 똑바로 된 기획자의 업무를 기대해서도 안 되고, 기대할 수도 없을 겁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