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추억

꽤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회사에 들어간지 얼마 안된 밀피유씨는 그만 회사에서 출전하는 게임쇼에 따라가게 됐습니다. 게임쇼 출장 멤버들을 보면, 과장에 팀장에 쟁쟁했는데, 회사에 들어간지 갓 반년이 좀 넘은 사원 한명이 끼어있는 건 어딜 봐도 이상했습니다. '주전자 나르는건가?'라고 예상했지만, 어딜 봐도 주전자는 없었습니다. 개발팀 스텝 중에서 그나마 현지에서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잘 할것 같이 생겨서 출장 가는데 포함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지에서 행사를 준비하는데 꽤 골때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행사에 들어갈 PC를 준비하기 위해 꽤 커보이는 오피스 빌딩의 대행사 구석에 방 한칸을 PC 수십대로 점거하고 PC 세팅을 준비했는데, 건물의 전원 사정상 동시에 4대를 초과하는 PC를 연결하면 건물 전체에 전원이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회사에서 회선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적은 있었어도 전원이 문제가 된 일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다들 황당해 했습니다. 또, 꽤 큰 오피스 빌딩이었는데도 들어오는 인터넷 회선은 ADSL급 회선 하나. ... 지금은 많이 변했을테지만, 그땐 꽤 절망적이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에서 두세시간 걸리면 될거라고 생각한 일을 밤을 세워서 진행해야만 했습니다.

행사 당일 새벽에 이르러서는 행사장에 배치한 시연 PC들이 이유 없이 주저앉기 시작했는데, 몇 시간 삽질을 하고나서야 컴퓨터를 잘 보관해둔 구조물 안에서 열이 전혀 배출되지 않아 찜통더위를 견디다 못한 PC가 줄줄이 뻗어버린다는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행사 오픈이 몇 시간 남지도 않았는데 구조물을 개조할 수는 없었고, 급한 마음에 구조물 옆구리를 톱질해서 보기 민망하게 생긴 흉한 구멍을 내고 구멍 앞을 천쪼가리로 막아놓아버렸습니다. 뭐 사람 많아지만 알아서 가려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나마 우린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옆의 다른 부서에서는 PC를 넣으려고 만든 구조물 중간의 공간이 PC 크기보다 미묘하게 작아서 끌로 속을 파내기도 했습니다. orz 열기에 망가져버린 그래픽카드를 공수하기 위해 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그래픽카드 원정대가 택시에 몸을 싣고 모험을 떠나기도 하고요.

언니들 뒤에 있는 '똥색' 몬스터. orz

아. 부끄러운 추억은 이런건 아니고, 이윽고 행사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밀려 어왔습니다. 부스 구석에는 게임에 등장하는 몬스터중 일부를 꽤 큼직하게 만들어놨는데, 의사전달이 잘 안된 탓인지 처음 봐서는 무슨 몬스터인지 잘 몰랐습니다. 언듯 색깔을 보니 '똥색'으로 칠해진 것이 도통 게임에 나오는 몬스터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게 뭘까' 하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틀째 밤을 세운 후라 머리도 멍하고 해서 생각하는걸 관두고 관람객들 근처를 서성이며 졸음을 달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만치에서 할아버지 한분이 제게로 걸어오시더니, 근처에 있던 한 몬스터 조형물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포링이 아니군요. 그렇죠?"

... 네. 분명 그건 포링은 아닌게 분명했습니다. 일단은 이정도 나이가 있으신 분도 게임을 하신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그대로 저의 강점인 짧고 명료한 대답을 드렸습니다.

"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다시 한 번 그 몬스터 조형물을 응시하시다가, 고개를 개웃거리시고는 다시 제게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십니다. 이분은 제게 뭔가를 묻고 싶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 몬스터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갑자기 이틀 밤을 세운 졸음이 확 달아나고 꽤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같이 밤을 세운 다른 스텝들은 어딘가에 짱박혀 자고 있는 모양이었고, 부스 안에 통역하시는 언니를 빼면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 복장을 한 사람은 반경 100미터 안에 저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똥색' 몬스터 조형물이 대체 무슨 몬스터라고 만들어 놓은 건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암만 머리를 굴려봐도 게임에 '똥색' 몬스터는 안 나온단 말입니다.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체면도, 회사의 입장마저도 잊은 채로, 갑자기 없던 썩소를 얼굴에 띄우고 눈을 동그랗고 예쁘게 뜬 다음, 펩사이신을 발사하는 엉덩이에서 나는 듯한 온세상에 울려퍼지는 맑고 고운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하하. 뭐 뭘까요 *^^*"

... 그래요. 정확히는 '아하하. 나, 나니까시라네. 아하하하하 *^^*' 따위로 대답해버렸고, 할아버니는 실망했다는 표정 같기도 하고, 어이없다는 표정 같기도 한 오묘한 표정을 지으시며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진건지, 제가 졸려서 할아버지를 놓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2년 넘게 지난 지금도 웬지 그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제대로 몬스터 이름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만날 수 있을 일 같은건 없겠죠. 생각해보면, 그 즈음이 가장 재미있었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007/10/24 22:57 2007/10/24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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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 아사히나 | 2007/10/25 00:04 | 답글 | 수정

    표정이랑 목소리는 그렇다 치고 말 한 멘트가 진짜 저거였다면 나름 충격에 휩싸였을거 같음.

    .. 그냥 문장만 봐도 충격이 옴..

  • 답글: OpenID LogoMilfy | 2007/10/25 17:20 | 답글 | 수정

    ... 역시 좀 무모한 답변이었단 생각이 막 들어요. orz
    ... 그 할아버지는 잘 계실려나몰라요.

  • MPositive | 2007/10/25 08:53 | 답글 | 수정

    그..그래서 저 똥색 몬스터는 이름이 뭐에요?

  • 답글: OpenID LogoMilfy | 2007/10/25 17:20 | 답글 | 수정

    넵. 태그에 적혀있습니다. :)

  • 나니 | 2007/10/25 16:54 | 답글 | 수정

    결국 정답은 포링? ㄱ-

  • 답글: OpenID LogoMilfy | 2007/10/25 17:20 | 답글 | 수정

    알고보니 주황색 비스무리한걸 똥색으로 칠해놨더라구요.

답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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