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5 17:13
외면
"나는 그 사람들이 그런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몇주 전에 브라우저에 마우스로 여기 저기 클릭하다가 읽은 글의 일부입니다.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에 지금은 어디서 봤는지, 누가 쓴 글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의 일부에 제가 해당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외면'과 '설득'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 두가지 단어는 올 한해 동안 제가 해온 일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어쩌면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프로젝트의 진행 도중에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을 크게 수정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기술적인 문제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다른 모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헸고, 앞으로도 그런 상황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 가장 나쁜 선택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만든 대부분의 코드를 버리고, 많은 부분을 재작성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때까지 프로젝트는 1년 반 이상 지속된 상태였고, 프로젝트를 처음으로 '클로즈 베타'라는 이름으로 공개하는데 까지는 고작 14개월 전이었습니다.
아직까지 MMORPG를 개발하기 시작해서 처음으로 클로즈 베타를 시작하는데까지 14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14개월 내내 크런치 모드에서 일했고,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햇갈릴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개발 방향을 변경하기 전에 돌아가던 수준만큼 프로젝트를 제작하는데 14개월이 걸렸습니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14개월 동안 제자리걸음을 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전이나 지금이나 프로젝트는 간신히 알파 수준을 막 지나가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누가 프로젝트를 '베타'로 진입시키는 것을 결정할까요. 많은 회사에서는 '허들'을 만들어 두고, 적당한 분기마다 이 허들을 통과했을 때 프로젝트가 다음 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합니다. 여기에는 프로젝트의 완성도나 재미, 변화하는 시장에 대한 적합성 등을 따질 겁니다. 하지만 회사나 팀에 이런 기준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프로젝트의 베타 진입을 결정한 것은 마케팅 부서였습니다. 프로젝트를 사전에 잘 계약해서 상당히 돈을 벌었으니 그걸로 그쪽 부서는 다들 특별 승진도 하고 성과급도 두둑히 받았겠지만, 그 댓가로 14개월 내내 크런치 모드로 일해서 나온 알파는 멋대로 '베타'란 이름을 달고 사람들 앞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우리들에겐 '야근비'라고 부르고 '저녁값'이라고 쓰는 잔돈이 나왔는데, 새벽에 택시타면 적자였습니다. 강남역 사거리에서 새벽에 택시를 잡다가 다들 감기를 달고 살았지요.
우리가 봐도 병신같은 프로젝트의 상태를 유저들이 좋게 봐줄 리는 별로 없었습니다. 오픈베타가 시작되는 날 새벽에 아이템이나 전투 부분의 수치가 완전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걸 바로잡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여기 저기 터지는 구멍을 메우기에도 바빴습니다. 그렇게 오픈베타가 시작됐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당연히 아직 안 만든 부분을 마저 만들고, 아직 알파 상태나 다름 없는 게임을 진행 중인 고마운 유저들의 피드백을 최대한 게임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판단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게임을 만드는 일과는 아무 관련도 없을 유저들이 게시판에 늘어놓는 소리조차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서 첫번째 패치로 뭘 했느냐. '새로운 컨텐츠'를 추가하는 일을 했습니다. 새로운 패치란 건, 오픈 베타를 시작하고 나서 약 6주만에 한 소위 '대규모 밸런스 패치'라는 걸 이야기합니다. 오픈베타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전투와 관련된 밸런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수치를 제대로 맞출 수 없었던 것은 게임의 모든 부분이 사정없이 변경되었기 때문이었는데, 게임의 변경을 총괄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총괄자가 게임을 변경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몇 주가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치를 맞춰 두면 그런 '알려지지 않은 변경사항'에 며칠치의 작업이 헛수고가 되기를 몇번이고 반복했습니다.
그렇지만, 유저들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한 밸런스에 대한 문제보다는, 완성되지 않은 전투 자체에 대한 문제가 더 크게 지적됐습니다. 전투와 밸런스를 따로 떼놓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파이어볼이 나가서 버그로 데미지가 1 뜨는 것과, 파이어볼을 눌렀는데 클라이언트가 뻗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1년이 넘게 강행된 개발로 팀에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개발에 체계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개발에 대한 목표도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는데 클로즈 베타를 시작한지 1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체계를 만들고, 크런치 모드로 박살난 개발자들을 제정신 차리게 만들고, 목표를 세우고 개발을 계속하도록 하는 일련의 작업입니다.
하지만, 총괄자는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기는 게임의 문제점들은 기획 단계에서 잘못된 것이며, 기획 사항을 변경하고 게임 데이터를 수정하는 것으로 게임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게임에 새로운 컨텐츠를 추가함으로써 유저들의 관심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됐지만, 총괄자와 그 윗사람들이 보기에는 좋은 모양이 나옵니다. 그 결과로 '대규모 밸런스 패치'란 꼴같잖은 패치가 이루어졌고, 유저들은 환호했습니다. 그 '대규모 밸런스 패치'가 이루어진 주의 동접자 하락 그래프를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외면했습니다. 두 가지를 외면했습니다. 총괄자의 의견과, 유저들의 의견입니다. 유저들의 의견을 외면하는 것은 쉬웠습니다. 게시판을 안 보면 됐습니다. 운영 부서에서 그 난장판의 의견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개발팀에 보여줬습니다.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컨텐츠를 추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총괄자를 설득했습니다. 아마도 몇 주 동안, 여러 사람이 그랬습니다. 예상하신 것처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리는 지금도 '4분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지난 여름에 한 '대규모 밸런스 패치'랑 비슷한 '대규모 패치'란 것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부터 알고있습니다. 이 줄을 세워놓으면 A4 종이 두어장을 손쉽게 채울 패치리스트가 게임에 적용돼도 게임에 별 변화가 없을 거란 사실을요. 왜냐 하면, 게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 이전에 회사의 직원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해서 일을 안할 수는 없습니다. 이 상황을 만든 것은 비단 총괄자의 판단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 판단을 뒤엎을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다른 개발자들에게도 비슷한 만큼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 점이 가장 참을 수 없는 점입니다. 상황을 총괄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설득하는 것 조차 하지 못하는데, 다른 누구와 일을 하면서 그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분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괄자의 의사결정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조금은 늘어났다는 점. 한 가지 절망은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는 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