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의 P3

작년에 아이팟 터치를 샀다가 후다닥 팔고 나서 1년 정도가 지났는데요, 지금 돌아보니 국내에서 관심도 높아지고 지하철에서 들고 다니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수많은 회사에서 비슷하게 생긴 한쪽 면에는 덜렁 디스플레이만 달린 제품들을 내놓기 시작했지요. 어쨌든 터치보다는 다들 가격이 낮은 편이었고 음악과 동영상을 재생하는 기능 이외에도 과거 PDA가 담당하던 역할을 상당 부분 대신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핸드폰도 비슷했는데, 아이폰이 나오고 나서 굉장히 많은 회사들이 역시 한쪽 면에 덜렁 디스플레이만 달린 제품을 많이도 만들어냈습니다. 이 제품들도 일단 스펙 상으로는 아이폰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아주 많이 팔리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 출시된 아이폰 카피 제품 대부분은 감압식이라 터치를 한 번이라도 만져봤다면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거지 같은 경험을 안겨줄 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핸드폰 계열에서 아이폰만큼 많이 팔리는 건 블랙베리와 블랙베리 카피 제품 정도입니다.

지난 주에는 팀원 중 한 분이 Yepp-P3를 사용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멀리서 보니 아이팟 터치와 비슷하게 생겼고 터치 방식도 감압식이 아닌 모양입니다. 만져 보니 생각보다 조작감은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조금 흥미가 생겨서 이리 저리 만져보다가 문득 P3에도 음악, 동영상 재생 기능 외에 여러 프로그램들이 들어있어 일정이나 메모 같은 것들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 생각났습니다.

일단 손가락으로 화면을 슥 밀어 잡다한 프로그램이 있는 화면으로 넘어가는 느낌은 괜찮았습니다. 지하철 노선도 아이콘이 있길래 눌렀는데, 그 다음부터는 한숨이 푹푹 나왔습니다. 일단 화면이 예고 없이 옆으로 돌아가길래 저도 따라서 화면을 돌렸고 이해 안 되는 세계 지도를 한참이나 쳐다보고서야 이 프로그램이 전 세계의 지하철 노선도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간신히 좆만한 한국 지도를 눌러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 스크롤 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화면을 슥 그었지요. 그랬더니 화면 네 귀퉁이에 스크롤 버튼이 나타났습니다.

…… 아아. 그랬습니다. 이 기계는 비록 멀티터치를 지원하는 제품은 아니지만 손가락으로 화면을 그어 기기를 조작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기계입니다. 이런 경험을 기계 전체에 지속적으로 제공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들도 모두 가이드라인을 따라 만들어져야 하지만 그렇질 않았습니다. 내장된 프로그램들은 그냥 핸드폰 프로그램 만들던 대로, 아무런 인터페이스 가이드라인 없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지하철 노선도는 손가락으로 스크롤이 되기는 커녕 스크롤 버튼을 누르면 수십 도트씩 멋 없게 스크롤 됐고 메모 프로그램은 생긴 것이 핸드폰에 들어있던 그것과 너무 똑같이 생겨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P3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얼마 전에 나와 주변의 꽤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소니 에릭슨의 엑스페리아도 기계 자체의 스펙은 흥미로웠지만 세티즌에서 조작 동영상을 보고 뒤로 쓰러졌습니다. 내장된 프로그램은 모두 제각각의 인터페이스로 만들어져 있었고 각각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도 않았으며 그나마 내장된 프로그램들은 ‘번호판 눌러서 사용하는 핸드폰’을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쿼티 자판이 달려 있어도 이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아이폰이 나온지 몇 년이 지나고 수많은 회사들이 짝퉁을 아무리 만들어 대도 결국 아이폰에 사람들이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혹은 아이팟 터치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핸드폰이나 음악 플레이어나, 기계를 그럴싸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소프트웨어가 병신이면 결국 병신이라는 겁니다. 유저는 한 면이 디스플레이로 가득한 기계에서는 결국 손가락으로 접하는 건 소프트웨어 뿐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계의 좋은 스펙이 아니라 그 안에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사용자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이고, 아이폰, 아이팟 터치 짝퉁 만드는 회사들은 기계에 집중할 뿐 소프트웨어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겨우 저따위 짝퉁스러운 기계를 만들 뿐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2009/04/18 14:54 2009/04/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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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란소년 | 2009/04/19 19:25 | 답글 | 수정

    아아 아이팟을 물리칠 용자는 아직 없는 것인가...

  • 답글: Milfy | 2009/04/23 20:21 | 답글 | 수정

    그러게말입니다. 기계덩어리만 만들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은 짝퉁 이상의 물건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 daybreaker | 2009/04/19 19:34 | 답글 | 수정

    요즘 강남대로에 보면 무선랜도 제공하고 아래쪽에 간단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는 작은 타워들이 가로수 대신 늘어서있지 않습니까. 거기 달린 화면이 터치스크린인데 메인 화면은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서 스크롤이 되는데 지하철 노선도만 들어가도 화면 아래의 화살표 버튼을 눌러 수십 픽셀씩 움직이는 스크롤을 자랑하더군요....-_-;

    이래서 안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ㅠㅠ

  • 답글: Milfy | 2009/04/23 20:21 | 답글 | 수정

    P3 를 처음엔 '아 그럴싸하네' 하고 만져보다가 인터페이스가 안 맞는 부분이 나타나자마자 확 사그러들더군요. '아 이래서 짝퉁은 짝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아직도 10년 전에 핸드폰 프로그램 만들던 습관을 못 버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기계는 있지만 UI가이드는 없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 아크몬드 | 2009/04/20 08:46 | 답글 | 수정

    Windows Mobile 7.0이 여간 좋게 나오지 않는 이상, iPhone OS에 이길 가능성이 적게 느껴집니다.

  • 답글: Milfy | 2009/04/23 20:22 | 답글 | 수정

    운영체제가 잘 만들어지고 말고와는 별 관계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 답글: solette | 2009/05/02 12:09 | 답글 | 수정

    운영체제 자체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다양한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일관된 사용환경을 유지'하는 점이겠지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애플은 OS X에서도 강력한 UI 가이드로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일관된 사용환경을 갖게 해 온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OS X의 다른 프로그램들과 조금은 다른 느낌을 주는 파폭을 안 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 lebius | 2009/06/22 20:30 | 답글 | 수정

    아이팟은 블루투스 안되는게 너무 뼈아파요. 그래서 p3에 관심 가지고 있었는데 스펙 너머의 문제점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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