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30 05:04
기획자의 센스
개발팀 내에서 그림도 아니고 코드도 아닌 나머지 산출물은 통상 기획자들이 만들어 냅니다.코드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산출물에는 문서가 있는가 하면 게임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텍스트도 있습니다. 이 게임에 들어가는 텍스트는 이름이 될 수도 있고 대사가 될 수도 있고, 때때로는 기나긴 문장이 될 수도 있는데, 그래픽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의 작업이 아닌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기획자들이 담당하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기획자들은 수학적인 센스도 필요하지만 언어적인 센스도 필요하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했습니다. 보통은 지독하게 사무적인 말투로 글을 쓰지만 가끔은 부드러운 말투로 글을 써야 할 때도 있고, 게임에 들어갈 아이템이나 사람 이름을 정하기 위해 돌지도 않는 머리를 쥐어 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센스가 필요합니다.
자 그러면, 이 언어적 센스를 가진 사람이 기획자여야 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원래 기획자는 언어적 센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말 하는 센스가 엉망 진창입니다. 같은 말을 어렵게 말하기도 하고 문장을 길게 쓰는 나쁜 버릇도 있습니다. 상황을 재미있고 조리 있게 설명하는데 서투르고 재미있는 표현이나 감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이거 큰일입니다. 기획자가 이래서야 게임에 쓸만한 텍스트가 들어가는 것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틀린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 정도 생각을 바꿀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게시판에 아이디어 공모 이벤트를 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당시에 장기간 아무 이벤트 없이 게시판을 방치하는 것이 애매해서 뭐든 게시판에서 할 수 있는 적당한 이벤트를 생각하다 보니 아이디어 공모가 된 것이었는데, 아이디어 자체는 대부분 팀에서 이미 고민해본 것들이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연령대가 낮은 유저들의 센스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방패를 들고 상대의 공격을 막는 스킬을 넣어 달라던 한 유저가 지은 스킬 이름은 ‘산성’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제 게임에 들어갈 캐릭터의 대사를 만들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대사라고 해봐야 대강 상황에 따라 두 세 마디 만들고 말 작정이었는데, 프로그래머가 이 캐릭터의 애니메이션 마다 각기 다른 말을 넣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 왔습니다. 그도 괜찮겠다 싶어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제게 돌아온 것은 프로그래머가 ‘대충 입력 해놨다’는 애니메이션에 따른 대사였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래머가 대충 썼다는 대사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왠지 대사를 하는 캐릭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고 말로만 듣던 캐릭터가 실제로 느껴지는 기분도 듭니다. 고민 끝에 말이 틀린 부분을 조금 수정해서 그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프로그래머의 언어 센스가 저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습니다.
과연 제 머리로만 고민해서 ‘산성’ 같은 괴상한 센스를 생각해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제 머리로만 고민해서 재미있는 대사를 쓸 수 있었을까요. 결코 아니었을 겁니다. 팀에는 굳이 기획자가 아니더라도 재미 있는 언어 센스와 재미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그런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기획자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접어 두기로 했습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 팀에 있다면 그게 뭐든지 간에 그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게 부족한 언어적 센스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직군을 가리지 않고 팀 내의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망치 이름을 정할 때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시각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의견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기획자가 센스가 부족하다면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오히려 결과가 더 좋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요새 일하는 모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