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오덕을 실망시킨 파판 공연

지난 한달 반 동안 혹시나 잃어버릴까 무서워 영화 티켓을 모아 두는 바인더 맨 뒷 페이지에 넣어 두고 넣어둔 것을 잊어버릴 까봐 핸드폰 캘린더에 적어놨습니다. 어제 저녁에 회식에서 술을 있는 대로 마시고 집에 돌아와 가물거리는 정신에 덜덜 떨고 있는 핸드폰을 꺼내보니 '바인더 맨 뒷 페이지에서 내일 공연 티켓을 꺼낼 것'이라고 써있더군요. 핸드폰님의 명령에 따라 한달 반 동안 고이 모셔져 있던 티켓을 꺼냈습니다. 어느새 기다림이 끝나고 파이널 판타지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두시 반, 예술의전당 주변을 수천 오덕들이 뒤덮었습니다. 예술의전당에서는 다른 전시도 하고 있었는데 입구 카페에 샌드위치 하날 시켜놓고 창가에 앉아 여친과 창 밖을 보며 서초 11번 마을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저 사람들은 뭘 보러 왔을 지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외형이나 행동에 보이는 특징만으로 구분하는 건 위험하지만 창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한 짐작은 잠시 후 콘서트 홀에 들어가 거의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파이널 판타지 오케스트라 디스턴스 월드 공연은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프로그램 구성이 재미없었고 '얼마나 좋을까'를 부르러 나온 이수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노래를 완전히 망쳤습니다. 오케스트라 편곡은 힘과 섬세함에 균형을 잃고 전곡이 비실거렸고 특히 금관악기는 맥 빠진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내한 공연임에도 영어로 떠드는 지휘자가 뭐라고 하는지는 각자 알아서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싼 수십 오덕들이 곡이 시작되는 순간 제목 먼저 맞추기를 하느라 쉴 새 없이 재잘거렸습니다. 작년의 잼프로젝트 공연이나 칸노요코 공연과 비교해 보면 진심으로 돈이 아까운 공연입니다.

일단 프로그램 구성이 재미없었습니다. 이쪽은 연출의 영역일 텐데, 사실 곡 하나하나와 화면 연출은 흥미로웠습니다. 초코보데왈츠를 연주하며 파판 전 시리즈에 걸쳐 초코보를 구경시켜 준다든지, 바밍 미션을 연주하며 파판7 초반 플레이를 그대로 보여준다든지 하는 부분들은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여러 곡을 연결해야 하는 이런 공연에서 각 곡은 앞뒤 곡들과 아무런 연관도 없이 연주됐고 그냥 가나다 순으로 정렬해서 연주해도 공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좋을까'를 부르러 이수영이 나왔습니다. 지휘자가 이수영을 소개하자 다들 환호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전날 술이라도 마셨거나, 신종플루에라도 걸린 듯 빌빌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내려갔습니다. 마이크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도 있던데, 마이크가 이상했다고 해도 곡의 절반가량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마당에 음향시설을 탓해도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요일 공연에서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 거라고 희망을 가져 봅니다. 물론 저는 토요일 한 번으로 족합니다. :( 등장할 때 들려온 환호와는 달리 퇴장할 땐 박수소리조차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금관악기들이 우울한 연주를 들려줬습니다. 처음에는 편곡이 이상한 게 아닐까도 의심했지만 파판 오케스트라는 이게 첫 공연이나 편곡의 첫 발표가 아닙니다. 적어도 10년 전부터 편곡해서 연주하던 곡들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맥 빠지고 잘 맞지 않는 연주를 들려줬는데, 특히 금관악기들이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했습니다. 지휘자의 지시에 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황 엘범을 통해 수없이 듣던 연주와는 달리 금관악기들이 치고 나와야 할 부분에서도 빈둥거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오덕짓 하려면 모국어 포함 3개 국어는 기본입니다. 하도 복사질을 하다 보니 시장이 작아져 아무도 한글화나 정발을 하지 않는 상황이 장기간 계속되자 유저들은 알아서 외국어를 익히기 시작해 수준급에 다다랐습니다. 일본어나 영어로 진행되는 해외 유명 개발자나 가수, 성우, 아티스트 등의 인터뷰에 통역을 끼우지만 통역이 입을 떼기 전에 이미 오덕들은 반응해 버립니다. 질문 시간이 되면 오히려 이쪽에서 영어나 일본어로 직접 물어보고 통역은 오히려 관객들의 말을 다시 관객들에게 통역하는 괴상한 일도 벌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오덕들은 이런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행을 담당한 지휘자가 영어로 떠들며 진행하는 모든 부분에서 한글 통역, 자막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덕들이 원래 외국어에 강하지만 이건 준비 부족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덕들의. 매너도 엉망이었는데, 제 왼쪽 오덕은 곡이 시작될 때마다 그 옆 오덕과 "칠이다", "십일이다" 라며 떠들고 앉았고, 그 뒤에 앉은 다른 두 오덕은 "이건 에어리스 죽을 때 나왔어" 라든지, "레노아 지금 보니 허접하다" 따위의 감상 평을 연주 도중에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여덟 시 방향에 앉은 오덕은 남자목소리 톤이 높아 아주 거슬렸는데, 눈에 살기를 담아 두 번 마주쳐주니 조용해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오덕들의 관객매너는 엉망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아주 실망스러운 공연입니다. 만약 일요일 공연도 토요일 공연 수준이라면 저는 티켓을 환불 받을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를 권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다시 오겠다"는 이런 공연의 마무리 멘트와는 달리 영영 오지 않는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실망스런 경험이라고 그냥 가서 보고 듣는 것이 나을 수도 있으니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 칸노요코도 잼프로젝트도 결코 다시 내한하지 않지요. :( 요약하면 구성도 연주도 관객도 그저 그런 공연이었습니다. 부디 토요일의 시행착오를 일요일에 만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처음으로 핸드폰으로 블로깅을 시도해 봤는데 생각보다 편하네요. 앞으로는 블로깅에 핸드폰을 좀 더 자주 써야겠습니다. :) )

2010/02/06 23:35 2010/02/0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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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 고어핀드 | 2010/02/06 23:48 | 답글 | 수정

    "한국에서 오덕짓 하려면 모국어 포함 3개 국어는 기본입니다."

    >> 역사 오덕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는... 오히려 심한... ㅠㅜ

  • 애드민 | 2010/02/07 00:57 | 답글 | 수정

    기대하셨던 공연이 예상과 달라 실망스러우셨겠어요. 안타까운 현실이네요.

  • 남박사 | 2010/02/07 03:19 | 답글 | 수정

    못가서 "흥, 퀄리티가 거지같을 거야" 라는 식의 신포도여우(...) 악담을 했는데 정말 들어맞았구나 우왕

  • 김용호 | 2010/02/08 17:02 | 답글 | 수정

    헉 콘서트에 와서도 네타를 저지르다니;;; (에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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