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 검색된 포스트 '13'건

  1. 2009/04/30  기획자의 센스 (7)
  2. 2009/04/26  Braid
  3. 2009/04/24  표준 101키 키보드 설정 (6)
  4. 2009/04/20  동네 빵집 (6)
  5. 2009/04/20  그래. 부활만 해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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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센스

개발팀 내에서 그림도 아니고 코드도 아닌 나머지 산출물은 통상 기획자들이 만들어 냅니다.코드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산출물에는 문서가 있는가 하면 게임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텍스트도 있습니다. 이 게임에 들어가는 텍스트는 이름이 될 수도 있고 대사가 될 수도 있고, 때때로는 기나긴 문장이 될 수도 있는데, 그래픽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의 작업이 아닌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기획자들이 담당하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기획자들은 수학적인 센스도 필요하지만 언어적인 센스도 필요하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했습니다. 보통은 지독하게 사무적인 말투로 글을 쓰지만 가끔은 부드러운 말투로 글을 써야 할 때도 있고, 게임에 들어갈 아이템이나 사람 이름을 정하기 위해 돌지도 않는 머리를 쥐어 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언어적 센스가 필요합니다.

자 그러면, 이 언어적 센스를 가진 사람이 기획자여야 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원래 기획자는 언어적 센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말 하는 센스가 엉망 진창입니다. 같은 말을 어렵게 말하기도 하고 문장을 길게 쓰는 나쁜 버릇도 있습니다. 상황을 재미있고 조리 있게 설명하는데 서투르고 재미있는 표현이나 감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이거 큰일입니다. 기획자가 이래서야 게임에 쓸만한 텍스트가 들어가는 것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틀린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 정도 생각을 바꿀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게시판에 아이디어 공모 이벤트를 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당시에 장기간 아무 이벤트 없이 게시판을 방치하는 것이 애매해서 뭐든 게시판에서 할 수 있는 적당한 이벤트를 생각하다 보니 아이디어 공모가 된 것이었는데, 아이디어 자체는 대부분 팀에서 이미 고민해본 것들이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연령대가 낮은 유저들의 센스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방패를 들고 상대의 공격을 막는 스킬을 넣어 달라던 한 유저가 지은 스킬 이름은 ‘산성’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제 게임에 들어갈 캐릭터의 대사를 만들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대사라고 해봐야 대강 상황에 따라 두 세 마디 만들고 말 작정이었는데, 프로그래머가 이 캐릭터의 애니메이션 마다 각기 다른 말을 넣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 왔습니다. 그도 괜찮겠다 싶어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제게 돌아온 것은 프로그래머가 ‘대충 입력 해놨다’는 애니메이션에 따른 대사였습니다. 그런데 프로그래머가 대충 썼다는 대사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왠지 대사를 하는 캐릭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고 말로만 듣던 캐릭터가 실제로 느껴지는 기분도 듭니다. 고민 끝에 말이 틀린 부분을 조금 수정해서 그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프로그래머의 언어 센스가 저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습니다.

과연 제 머리로만 고민해서 ‘산성’ 같은 괴상한 센스를 생각해낼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제 머리로만 고민해서 재미있는 대사를 쓸 수 있었을까요. 결코 아니었을 겁니다. 팀에는 굳이 기획자가 아니더라도 재미 있는 언어 센스와 재미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그런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기획자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접어 두기로 했습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 팀에 있다면 그게 뭐든지 간에 그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게 부족한 언어적 센스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직군을 가리지 않고 팀 내의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망치 이름을 정할 때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시각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의견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기획자가 센스가 부족하다면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오히려 결과가 더 좋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SDC10862

이건 요새 일하는 모습. :(

2009/04/30 05:04 2009/04/30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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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d

Braid’라는 게임을 라이브 아케이드의 전체 게임 목록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프리뷰 이미지에 모래시계 하나만 덜렁 있어 별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회사 게시판에 독특한 퍼즐 게임이라는 설명으로 글이 올라왔길래 데모를 다운로드 해 플레이 해 보게 되었습니다.

‘괴물에게 붙잡힌 공주를 구출하는 모험을 떠난다’라는 내용은 하도 많은 게임에서 사용해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지경이지만, 이런 게임 형식에 공주를 구한다고 하고 보니 자꾸 게임 하나가 어른거립니다. 하지만 여기에 파란 버튼을 눌러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것, 월드마다 각기 다른 시간에 대한 아주 독특한 룰이 다른 ‘공주를 구하는’ 게임과 완전히 다릅니다.

간단히 나열해 보면 시간을 언제든지 되돌릴 수 있는 기본 룰에 월드 2는 그 기본 룰 자체, 월드 3은 녹색으로 빛나는 되돌아 가는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오브젝트, 월드 4는 내 움직임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시간, 월드 5는 시간을 되돌려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이전 시간의 내 잔상, 월드 6은 주변 공간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반지, 마지막으로 월드 1은 게임의 스토리를 말해줍니다. 이 아주 독특한 규칙과 정신 나간 레벨 디자인은 미친 듯한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패드를 놓지 않도록 만드는 강한 매력이 있습니다. 거기에 게임 전체에 흐르는 아름다운 그래픽과 음악은 월드를 지나며 퍼즐 조각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월드 1과 에필로그를 본 다음 한숨을 쉬게 만들었습니다.

‘퍼즐 게임에 이 정도로 감정 이입을 한 적이 있던가’, ‘단 하나의 퍼즐을 놓고 이렇게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감정 이입을 한 게임은 꽤 있습니다. 콜 오브 듀티 4를 플레이 하면서 끝에 캡틴 프라이스가 죽어가며 밀어주는 권총을 집어 들고 화면에 아무 임무 표시도 안 되어 있었지만 눈앞의 아사드에게 분노가 담긴 총질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퍼즐에 한 고민의 기억은 저 멀리 10년 이상 전에 리븐을 플레이 하면서 끝 부분의 퍼즐 하나를 몇 주 동안 고민했던 것이 전부입니다. 이 게임은 그 정도로 매력적이고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퍼즐은 ‘시간’이라는 요소가 들어가면서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이 말은 ‘차원이 다르다’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데, 생각을 각기 다른 차원에서 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퍼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특히 월드 6에서 주변을 느리게 만드는 반지를 이용하는 ‘엘리베이터 액션’ 스테이지와 월드 5에서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조금 전의 나에게 열쇠를 빼앗는 부분, 그리고 월드 4의 내 움직임에 따라서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발판을 향해 뛰어야 하는 부분들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게임 시나리오를 전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훌륭한 3D 비주얼과 실제 음성으로 영화와 같은 경험을 제공하기도 하고, 캐릭터 이미지와 텍스트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외적인 부분 말고도 포탈처럼 게임의 모든 부분에 스토리라인이 잔잔히 흐르도록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게임은 수없이 많은 은유로 가득한 화면을 가득 채운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보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로 스토리를 전달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주 독특한 퍼즐 게임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멘하탄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의 놀라움은 화면을 가득 채운 텍스트 그 이상으로 메시지를 전달해 옵니다.

게다가 상당히 번역하기 어려울 만한 문장들인데도 지난번 ‘A Kingdom for Keflings’처럼 거지 같은 한글화로 기분이 상하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아쉽게도 ‘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 같은 문장이 ‘우린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른 거야’로 번역되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다면 번역은 훌륭하게 게임 분위기에 잘 어울립니다.

에필로그를 본 다음 게임에 대해 이것 저것 검색해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게임 곳곳에 숨겨진 별을 모두 모으면 아주 아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게임의 주제를 좀 더 직접적으로 – 여전히 아주 아주 은유적이지만 – 표현한 비주얼을 볼 수 있다는 모양입니다만, 워낙 높은 난이도로 본편을 플레이 하는데도 연속 13시간 이상 달려온 나머지 발 끝까지 지쳐 거기까지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별을 모은 다음에 나오는 다른 엔딩 동영상을 보며 별 먹기를 시도해 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후회가 들기는 했지만, 게임 본편에서 보여준 퍼즐로도 충분히 게임을 즐겼다는 생각입니다. 또, 에필로그 스테이지에서 각 화면의 빨간 책만 펼친 다음 숨을 수 있는 오브젝트 뒤에 들어갈 때 나타나는 ‘공주’ 입장의 스토리로도 게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엔딩 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지만요.

braidLobby

게임이 유저에게 어떤 경험을 줘야 하는가에 대해서 저는 ‘즐거운 플레이와 생각해볼 만한 여운’을 줄 수 있으면 훌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Braid’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훌륭하게 충족합니다. 이 정신 나간 게임 플레이와 미칠 듯한 레벨 디자인, 게임과 잘 어울리는 비주얼과 음악, 엔딩을 보고 나서도 스테이지를 선택하는 게임 로비에서 게임을 종료하지 못한 채 한참을 완성된 퍼즐 앞에서 맴돌게 만드는 여운까지,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게임입니다. 누구나, 언젠가 꼭 한번은 플레이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

아. 처음에는 공주를 구하러 간다 길래 주인공은 당연히 ‘왕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 위에서 이야기한 이 게임과 비슷한 ‘어떤 게임’에서도 주인공이 왕자가 아니었습니다만, 처음엔 저 주인공의 정장 차림이 이해 되질 않아 ‘아 정말 비호감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엔딩을 보고 난 다음에야 저 주인공의 옷차림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2009/04/26 04:10 2009/04/26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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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101키 키보드 설정

지난 3년 동안 HHKB를 사용해 오면서 키보드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습니다. 사실 이 키보드를 받아 맨 처음 해야 했던 작업은 이 키보드의 원래 용도와는 상당히 다른 엑셀 작업이었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펑션 키를 누른 상태에서 다른 키를 눌러야 홈, 엔드, 페이지업, 페이지다운 키를 누를 수 있다는 점이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익숙해졌고 나중에는 오른손이 마우스까지 가는 거리가 아주 짧다는 점과 오른쪽 아래 키를 컨텍스트 메뉴로 바꿔 엑셀에 키 배치를 최적화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한 15년 안에는 처음으로 ‘101키’를 사용해 보게 됐습니다. 101키는 아주 어렸을 때 사용해 봤는데, 그 때는 키가 좀 더 부드러운 것을 좋아했습니다. 학원에 있던 딱딱한 키보드 대신 친구네 집에 있던 랩으로 싸 둔 부드러운 키보드를 더 좋아했지요.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키보드를 누르는 습관이 나쁘게 들어 키를 세게 내리 치게 됐는데, HHKB는 좀 더 부드러운 타입이었다면 이번에는 세게 두드리는 습관에 잘 맞는 딱딱한 키보드입니다. ‘IBM Model M’입니다.

101key

일단 꽤 오랜만에 풀 사이즈 키보드를 사용하는 거기도 하고, 한영키, 한자키, 윈도우키 같은 것들이 없는 키보드라 느낌이 좋습니다. 널직한 스페이스 키와 딱 벌어진 컨트롤 키와 알트 키 사이가 실수할 여지를 줄여줍니다. 게다가 키를 꽤 세게 두드리는 제 습관을 잘 받쳐주기도 하지요. 키들이 눌리는 감각이 확실하고 철컬철컹 튀어 오른다는 느낌이 들어 키보드를 누르는 느낌이 재미있습니다.

이 키보드를 사용하면서 처음 부딪친 문제는 지난 3년간 HHKB의 키 배치에 익숙해진 습관입니다. HHKB는 캡스락 자리에 컨트롤 키가 있습니다. 복사나 붙여넣기를 할 때 손목이 꼬이지 않지요. 거기에 왼쪽 아래 키는 윈도우 키로, 오른쪽 아래 키는 컨텍스트 메뉴로 설정해서 써 왔기 때문에 애초에 윈도우 키도 없고 컨텍스트 키를 할당할 키도 없는 키보드에서는 여러 가지로 난감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애초에 오른쪽 알트 키는 한영키로 할당 되어 있어 사용할 수도 없었지요.

101keymap

정말 오랜만에 101 키를 써 보는 거기도 해서 이런 키보드의 배치를 최대한 즐겨볼까도 생각했는데, 그 정도의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3년 동안 익숙해진 습관이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HHKB와 똑같이 맵핑을 해봤습니다. 캡스락은 컨트롤로, 왼쪽 컨트롤은 윈도우 키로, 오른쪽 컨트롤 키는 컨텍스트 메뉴로 설정했습니다. 그나마 HHKB에서는 펑션 + 탭으로 캡스락을 켜고 끌 수 있었지만 이제는 캡스락 키를 누를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양쪽 컨트롤 키를 모두 리맵핑 했기 때문에 키트윅을 실행하면 언제나 경고가 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으면 하고 바랬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회사에서 사용하기에는 너무 큰 소음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원래는 HHKB를 집으로 가져가고 회사에서 새 키보드를 사용할 작정이었지만 반대로 HHKB는 지금 대로 회사에서 쓰고 새 키보드를 집에서 사용해야 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2009/04/24 19:56 2009/04/24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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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빵집

이 동네에 산 지 5년이 됐습니다. 햇수로는 6년이 지났네요. 처음 취업한다고 올라와 이 동네에 살기 시작했었는데요, 이 동네도 처음 올라올 때와는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옆에 있던 재래시장의 규모가 이전에 비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주변을 매운 가게들도 종목이 매년 변하지요. 한 번은 PC방이 막 늘어났다가, 그 다음은 닭집이 늘어났다가, 그 다음은 삼겹살집이 막 늘어나기를 반복하는 식입니다. 요즈음은 24시간 편의점이 막 생기고 있지요. 언제 다 같이 망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동네에 아주 오래된 빵집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이사오기 전에도 있었을 거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 빵집이 정확히 언제쯤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년쯤에 20년 기념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던 것으로 보아 이 동네에서 20년은 장사를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는 빵집이 원래 이거 하나였는데, 같은 블럭에 던킨도너츠와 파리바게뜨가 서로 사거리를 마주 보고 생겼습니다. 그리고 한 1년쯤 지나자 던킨도너츠가 사라지고 지금은 파리바게뜨만 남았지요. 빠리바게뜨는 지하철 역 바로 앞에 있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블럭의 반대쪽 모서리에 있는 위에 이야기한 오래된 빵집에 영향을 끼치겠지요.

가끔 이 동네 빵집에서 빵을 사다 먹었는데, 몇 년 전부터 적립금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현금으로 산 빵값의 10% 정도를 적립했다가 쓸 수 있게 했는데 저는 적립금 카드를 몇 번이나 잃어버려 실제로 적립금을 제대로 사용해본 기억은 없습니다. 아마 주변의 다른 큰 빵집들이 하는 것들을 따라가 보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동네에는 홈플러스 수퍼 익스프레스가 들어오고 한동안 재래시장 상인들이 상권을 다 죽인다며 집회도 했지만 결국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또 주변의 가게들이 열리고 닫히고를 반복했지요.

그리고 지난 달 말에 이 빵집이 돌연 문을 닫고는 ‘내부 수리중’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설마 아예 문을 닫은 건가 싶었는데 현수막에는 내부 수리중이라는 말 이외에 4월 초에 문을 열겠다는 말이 함께 써 있었지요. 그리고 잠시 미친 듯이 회사 일을 하다가 문득 그 빵집 생각이 나서 가게 앞에 가봤습니다. 다시 문을 연 그 오래된 빵집은 오래도록 써 오던 이름 대신 잘 알려지지 않은 빵집 체인점 간판을 달고 있었습니다. 안에는 테이블도 몇 개 생기고 커피도 팔고 빵도 파는 가게가 되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이전에 입던 옷 대신 흰 블라우스로 된 제복을 입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많이 생기는 빵집을 따라가려는 모양입니다.

사실 이 빵집이 앞으로 이 동네에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뚫고 살아남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이 ‘비싼 커피’를 얼마나 즐길 지도 잘 모르겠고요. 하지만 동네에 기업형 수퍼마켓의 작은 버전이 들어와 주변 상권을 박살낼 우려가 있다는 소식이나, 거기에 대항해 삭발하는 동네 수퍼마켓 주인아저씨의 사진이 걸린 소식을 보면서 단지 반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동네에도 수많은 상인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홈플러스 수퍼 익스프레스가 들어와 주변 상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상인들이 주장하는 지역 업체의 입점과 지역 주민의 채용은 훌륭한 제안이지만, 교통부담금을 더 많이 부담시키는 식의 정책은 정상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기존 동네 가게들이 주변 상황이 변했음을 느끼고 대응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합니다. 카드 사용률이 점점 더 올라가지만 재래시장에서는 여전히 카드는 먼 나라 이야기이고, 같은 상품을 잘 모르면 돈을 더 내고 사야 하는 식으로 점점 더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스템은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동네 빵집의 계속되는 도전이 같은 블럭에 있는 기업형 제과점에 대한 경쟁력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머리를 밀기 이전에 동네 가게들 스스로가 상황의 변화에 대해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 동네 빵집의 건승을 빕니다. :)

2009/04/20 01:44 2009/04/20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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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부활만 해라

집 전화가 부활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음성 통화 기능밖에 없는 집 전화에 여러 가지 멀티미디어 기능을 추가하고, 집안의 통신 허브로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입니다. 집 전화 단말기에 멀티미디어 기능도 넣고, 일부 TV나 기타 가전기기에 연결해 사용하는 기능을 추가한 단말기가 시장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혹시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상황 같지 않습니까? 2년 전에 공중전화를 쓰려다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중전화를 쓰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공중전화에 최첨단 기능을 집어넣어 젊은이들을 끌어 모은다!!! … 네. 이번에는 집 전화에 똑같은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공중전화가 어떻게 됐나요.

저는 저 집 전화 부활 계획은 이전 공중전화 부활 계획과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고, 결국 얼마 안 남은 유선전화 사용자들의 요금을 엄한 곳에 쏟아 붓다가 돈만 날리는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일단 집 전화가 외 점점 더 외면 받게 되는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저도 집에 집 전화를 놓지 않았고, 부모님 댁에도 집 전화는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집 전화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일단 집에 붙어 있지를 않습니다. 낮에 출근해 있는 동안 집에 있는 집 전화에 벨이 아무리 울려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집에 만들어 두고 꼬박꼬박 기본요금을 내는 그 전화의 용도가 신호만 가는 거라고 하면 우울하죠. 그러면? 집에 걸려온 전화를 핸드폰으로 돌려 주는 서비스에 추가 요금을 내고 가입하면 되겠군요! 그러면 핸드폰만 들고 다니며 애초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게 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뭐가 있을까요. 집 전화가 멍텅구리 유선 전화 기능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많은 기능을 내장한 집 전화는 어떨까요. 집 전화에 전화번호가 수 천 개나 저장되고 통화 도중 홀딩도 되며 녹음도 되고 상대에게 음악도 틀어줄 수 있는 기계가 있는데 왜 이런 기계는 널리 보급되어 무너져 가는 유선전화 시장에 한 줄기 빛이 되지 못했을까요. 사람들이 정보를 관리하는 습관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PC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주소록은 보통 아웃룩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아웃룩에 주소를 추가하면 내 핸드폰에도 추가됩니다.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전화를 바꿀 때 매장에서 ‘전화번호부 옮겨주세요’ 하면 아무 기종끼리나 전화번호부가 옮겨집니다. 그러면 집 전화는 어떨까요. 집 전화 단말기 중에 내장된 전화번호를 끄집어내 PC와 싱크하거나 다른 전화로 집어넣을 수 있는 기능이 있던가요?

새로운 집 전화가 외치는 ‘엔터테인먼트 커뮤니케이션 허브’라는 말은 뭔가 그럴 듯 해 보입니다. 집 전화로 전화도 하고 음악도 듣고 야동도 본다고 합니다. 전화선만 꽂으면 뭐든 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전화로 보는 야동을 TV로 뽑아 대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는 기능도 당연히 지원해야겠군요. 그러면 그 음악과 동영상은 어디서 끌어오나요. 유선전화 뒤꽁무니에 달린 전화선으로 끌어오나요? 아니면 유선전화 단말기 뒤에 랜선을 꽂나요? 그러면 문자도 보내고 인터넷도 되는 인터넷 전화 단말기와 뭐가 다른가요? 야동 TV-OUT 기능?

멀티미디어를 중앙에서 관리하는 장비라는 건 오래 전부터 여러 회사에서 고민해 온 주제입니다. 애플은 애플TV로, 마이크로소프트는 미디어센터로, 각각 홈 엔터테인먼트를 중앙에서 관리하는 제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제품의 특징은 네트워크 기능, 커다란 스토리지, 다양한 입출력 기능, 미디어 관리 기능 등입니다. 그러면 ‘엔터테인먼트 커뮤니케이션 허브’를 주장하는 집 전화 단말기가 이런 기기들을 따라가라면 뭘 해야 할까요. 일단 랜선 달고, 무선랜 달고, 하드디스크도 달고, 뒤에 TV-OUT 좀 달고, 음악이나 야동을 관리할 인터페이스도 개발해 넣어야겠군요. 그럼 이 기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전화 달린 컴퓨터? 컴퓨터 달린 전화? 제 생각에는 PC에 모뎀 달고 전화선 꼽을 수 있게 만든 장치로 생각되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시작부터 제정신이 아닌 이상한 단말기로 집 전화 부활을 꿈꾸는 프로젝트가 실패할 거라고 예상하는 이유는 집 전화 단말기에 붙이려고 하는 수많은 기능이 집 전화가 뛰어들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기기들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어 집 전화가 이 사이를 파고들기에는 ‘엔터테인먼트 커뮤니케이션 허브’라는 어정쩡한,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위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 전화는 아직 죽질 않았기 때문에 일단 부활하려면 죽여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단말기 가격을 올리면 집 전화를 효과적으로 죽여 부활시킬 수 있겠지요. 쥐새끼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유사합니다.

2009/04/20 01:19 2009/04/20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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