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수 있는 교과서가 생겼다.
학교에 다니면서 가장 곤란했던 경험 중 하나는 수업 방식에 칠판에 뭔가를 적는 일이 아주 많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교과서와 노트가 있었는데 언제나 선생님은 수업 중 칠판에 줄기차게 뭔가를 적어 내려갔고 나머지는 열심히 받아 썼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게 교사용으로 나온 참고서를 그대로 배끼는 거란 사실을 알았지만 교사용 참고서를 입수할 길이 없는 학생 입장에서는 칠판에 빽빽하게 적힌 글자들을 받아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안에서 시험 문제가 나왔죠.
왜 이게 곤란한 경험이었냐 하면 제 시각 하드웨어에 문제가 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문제가 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맨 먼저 하는 행동이 제 눈 앞에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이게 몇 개로 보이느냐”고 묻는 거였는데 눈 앞의 손가락 개수를 세는 것과 칠판의 글자를 읽는 일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시각장애를 평가하는 기준표에 같은 방식으로 설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손가락 개수를 세는 방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말입니다.
교과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는데, 중고등학교에 가보니 교과서에 글자 크기가 한없이 줄어들었습니다. 일단 본문 크기가 줄어들어 좀더 빽빽해졌고 덕분에 그 옆에 붙은 주석 표시 같은 것은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시각 하드웨어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뭐 상관 없는 문제이지만 이들이 보기에 꽤 ‘보기 흉할 정도로’ 주석을 들여다 봐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물론 칠판에 적힌 참고서 내용을 받아 적는게 불가능했다는 점은 대강 넘어가기로 하죠.
이런 경험 때문에 전자책에 큰 관심을 가졌고 전자책을 ‘절대 안 내놓는’ 국내 출판업계에 쌍욕도 하고 스캔도 해보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영어 책을 읽는 선에서 타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저 같은 사람이 널려 있고 이들이 전자책을 사용하면 ‘별 것 아닌’ 문제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는 상황을 지켜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엊그제 애플이 미국에서 업계 1, 2위쯤 하는 교과서 업체들과 손잡고 - 세상에나 - 디지털 교과서 사업을 시작한다는 발표를 보았습니다. 생물 책에서 이중나선 구조를 손가락으로 이리 저리 돌려보고 식생을 조사하는 광경을 동영상으로 지켜보며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통계 자료로 그려진 그래픽을 바라보며 설명을 읽는 일은 즐거웠습니다. 요즘 유행인 앱북으로 만들어진 잡지에 지나치게 복잡한 네비게이션이 포함되어 읽다가 짜증나게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평 뒤에는 책을 잡아보고 1초만에 ‘텍스트 확대 버튼이 없다’는걸 발견하곤 난감함 함께했습니다. 네. 텍스트북 섹션에서 받은 책에는 텍스트 확대 버튼이 없었습니다.

디지털 책을 찾아 읽어야만 하는 거의 유일하며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 바로 그 기능이 없었습니다. 책의 구성에 감탄하고 가능성에 두근거렸지만 그 앞에는 또다시 과거에 겪었던 종이책의 장벽이 다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좀 안타깝기도 하고 착찹하기도 해서 한숨을 깊게 내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앱북이 레이아웃을 깨지 않기 위해 텍스트 확대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네들에게는 텍스트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의 존재보다 레이아웃이 깨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까요.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화면을 확대해서 볼 수 있으니까요. (이거 정말정말 유용합니다!) 하지만 애플은 결국 타협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네. 책을 돌려 세로 방향으로 들면 텍스트 확대 버튼이 나타났던 겁니다. 이 버튼을 찾아내 텍스트를 읽기 편안한 수준으로 확대하다가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그렇지. 이 작자들이 이런걸 빼먹을 리가 없지.’ 경험으로부터 오는 깊은 신뢰감 같은 것입니다. 남들이 다들 가로로 볼 때 저 혼자 세로로 보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과거에 경험한 자잘한 글자로 가득한 교과서에 접사를 하고 앉았는 꼴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물론 미국이라면 그렇겠지요.
남들은 좀더 넓은 시각으로 교과서의 퀄리티 저하 가능성이나 일인 출판 시스템이 가져올 신뢰의 붕괴, 애플이 독점하고 있는 시스템이 가진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책을 읽고 배우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무려 ‘나도’ 보고 읽고 만지작거릴 수 있는 ‘좋은’ 책이 겨우 십 몇 달러에 발에 채이도록 굴러다니고 있으니까요. 중간중간에 삽입된 자료를 보기 위해 잠깐 아이패드를 다시 가로 방향으로 돌리는 수고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세로 모드에서도 물론 가능하지만) 이런걸 중고등학교 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칠판에 글자가 적히는 기나긴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있거나 나 혼자 책을 읽어나가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드디어’ 읽을 수 있는 교과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