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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읽은 책 정리

11월은 팀은 바쁘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는 바쁘지 않았습니다. 프로젝트 시작부터 좀 급하게 만들어 둔 모든 기반을 다음 스탭들에게 넘기고 거기에 아쉬운 점이 있든 말든 프로젝트는 굴러갔습니다. 그쪽은 월말에 근무시간이 남은 사람이 없을만큼 지독하게 바빴지만 저는 그 다음의 기반으로 넘어갔고 그분들만큼 바쁘지는 않았습니다. 덕분에 짬짬히 카트에 쌓인 책을 조금 줄일 수 있었어요. 이번달에는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파운데이션 1 - 파운데이션, 일의 기쁨과 슬픔, 돌이킬 수 있는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지난 8월에 처음 읽기 시작한 작가님의 데뷔작인 '달과 육백만 달러'가 실린 책입니다. 난데없이 나타난 여느 아침드라마에 나올 법한 운석 충돌급 재앙 앞에 침착하고 담대함과는 먼 주인공의 대처를 따라 과거로 돌아갔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현실에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의문을 저도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가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분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분들은 자전거의 앞, 뒷 바퀴에 브레이크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에 굉장히 신기해했습니다. 저도 이 반응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러면서도 사람들 대부분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이유를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장기에 비슷한 과정을 겪으면서 자전거를 타게 되지만 그 시기를 놓치면 더이상 자전거를 배울만한 시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운동처럼 누군가가 가르쳐준다는 것을 본 적도 없고요. 거기에 멋있는 고학력 변태들이 모여 구상한 작전을 따라가다 말고 '으앜ㅋ 안됔ㅋㅋ' 하고 이빨을 꽉 깨물며 신나게 읽었습니다. 레이저라길래 반사적으로 적색을 떠올렸다가 녹색이란 말에 '그린 스모크'를 떠올렸고 이런 자잘한 장치들마저도 재미있었습니다. 달팽이와 다슬기는 퇴근길에 TTS로 들으며 희망을 가지다가 이야기가 뚝 끊기는 부분에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습니다. 왕의 결말에서는 남산 위에 솟은 바벨탑 같은 구조물을 떠올리고 있었고요. 영화 인디애나존스에서 닥터 존스가 비행기나 배를 타고 먼 곳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낡은 지도와 빨간 화살표로 표현하는 상상을 하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을 따라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기도 했습니다. 도라산역까지 달리는 장면은 출근길에 TTS로 들으며 저도 덩달아 개나리교1)를 뛰어서 건넜습니다. 덕분에 몇 분 빨리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지만요.

파운데이션

작년까지 저는 유명한 영화 하나와 소설 하나를 끝까지 남겨뒀습니다. 엄청나게 유명했고 여기저기 인용됐습니다. 생각하기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와 소설을 다 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여느때와 다름 없이 주워들은 대로 인용했고 아마 저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 영화와 소설을 봤을 거란 의심을 받았을 겁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파운데이션'입니다. 둘 다 워낙 유명하고 모든 곳에 인용됐습니다. 각각을 실제로 접한 적 없었지만 이들의 존재와 의미를 알고는 있었습니다. 문득 넷플릭스에 떡하니 나타난 것을 보고 그래도 한번은 봐야겠다 싶어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봤습니다.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여러 의미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수 십년 후의 미래 사람이 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뒤로 갈수록 어쩌면 당시에는 대단했을지도 모를 영화가 저를 반쯤 잠에 빠뜨렸습니다. 파운데이션도 비슷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와 저자의 존재감을 이해합니다만 70년이 지난 미래 사람이 늘 하던 대로 회의적 사고회로를 끄고 이야기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공간을 도약하고 지하 수 킬로미터까지 도시를 건설한 세계에 여전히 사람이 운전하고 도서관에 책 사본을 비치하고 미래를 온전히 계산하는 설정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스페이스 오딧세이는 한 번만 이빨을 꽉 깨물고 보면 됐지만 이쪽은 여섯 권이나 남아있고 이 상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단행본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느낌이 드는데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건지 똑바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구글에 제목으로 물어본 주소를 클릭하는 순간 '으앜ㅋ 이거ㅠ_ㅠ'하고 이야기가 생각나는 바로 그 이야기였습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실제 회사 르포라고 생각했습니다. '스크럼 합시다'. 동시에 서너개의 목소리가 바로 떠오릅니다. 비슷한 느낌의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나 한 명 쯤은 있는 빛나 언니를 답답해하다가 질척거리는 남자에 얼굴을 찌뿌렸습니다. '내가 말을 잘 하는 건 아닐까요?'라는 말에 주변 사람들과 나누던 이야기들이 스쳐지나가기도 (주마등이 어떤 건지는 모르니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진 않았음) 했고 도움의 손길을 보며 이건 분명 시사주간지에 보낼 원고를 잘못 실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멀쩡한) 첫 직장은 압구정역 근방에 있었는데 첫 출근 때 압구정역 계단을 올라가던 나를 잠깐 떠올려보기도 하고 문앞에 달린 카메라에 비친 남자들을 인쇄한 종이들이 붙은 짐이 다 빠져나간 빈 방을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마다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마침내 자작나무 숲 벤치에서 집 근처 디저트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문 앞에 열 다섯번째로 줄을 섰다가 산 얼그레이딸기를 퍼 먹으며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과 압구정역 계단을 올라가던 첫 출근길 사이의 거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방금까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던 감정에 비해서는 좀 더 차분해진 채로 책이 끝났습니다.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중간에 주인공을 따라 여러 감정을 오가다가도 끝에 가서는 그래도 편안하게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끝낼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딱 그런 이야기여서 좋았습니다. 물론 끄트머리의 '리빙'이란 말을 보고 잠깐 가슴이 철렁 한 건 비밀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지난달에 채식주의자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후입선출 방식으로 동작하는 서점 카트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이 책 역시 이번달에 카트 맨 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책을 추가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것은 읽기 시작한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무협 장르를 달가워하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릴때 이우혁 작가님의 책을 읽는 이중적인 태도가 있었기에 잠깐 당혹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따금 자동차들이 길을 매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절벽으로 몰아붙이는 위험한 시간이 되기 전 새벽 일찍 자전거로 올라다니던 동네 산성과 한동안 그로부터 아주 멀지는 않은 곳에 살며 지나다니던 길이 생각나 당황스러움은 사라지고 제 주변에는 온전히 이야기만 남았습니다. 누군가 이 책을 소개한 글에 반전 이후에는 술술 읽힌다고 했는데 제 입장에선 그런 반전이 한 번은 아니었습니다.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맙소사' 싶었고 나중엔 계속해서 정체를 드러내는 주인공들을 보다가 '고만해 이 미친놈들아!'2)같은 소릴 내고 말았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주인공을 따라가다가 템페레 공항 옆의 자작나무 숲 벤치에 앉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낸 평화로운 느낌으로 끝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만 바로 이어서 현실 뒤에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또 한편으로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겠어요?'란 마지막 말과 제가 유난히 약한 긴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제게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문득

문득 증명된 사실 끝에 실린 이야기를 생각해보다가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으므로 서로 다른 행성의 궤도가 겹치는 일은 …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은 다음 가끔 갑자기 번쩍! 하고 나서 어둠이 찾아오면 눈이 익숙해진 다음 이미 저 멀리 지나가버린 지구를 망연히 바라보는 상상을 하곤 하는데 그 상태로 우주가 사라지기까지 멍하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돌이킬 수 있는의 정여준의 여생이 부러워질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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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books-read-in-november.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11-30 21:12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