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사이드바

blog:books-read-in-september

9월에 읽은 책 정리

이번달에는 소설과 대중교양서, 그리고 평소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법한 자기계발서 한 권을 읽었습니다. 각각 토끼의 아리아, 빌트 -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네이비씰 승리의 기술입니다. '토끼의 아리아'는 이전부터 읽어오던 SF의 연장이었고 '빌트'는 흥미로워서 덥썩 선텍한 여느때와 별로 다르지 않게 충동적으로 고른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네이비씰 승리의 기술'이야말로 충동적으로 고른 책이 아닐까 싶은데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 내용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토끼의 아리아

지난달에 읽은 '지상 최대의 내기' 다음으로 읽은 같은 작가님의 단편집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 소소한 이야기' 정도로 이 단편들을 정의할 작정이었습니다. 헌데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숲 속의 컴퓨터'는 인생의 일부를 낭비하게 만든 어느 길고 지루하고 유명한 영화에 나오는 우주선을 제어하는 컴퓨터를 떠오르게 했습니다만 그와는 또 다른 냉전시대로부터 온 신비로움과 현대 한국 기업의 익숙함이 뒤섞인 이야기였습니다. 흡사 영화 터미네이터 3에서 마지막에 'y'키를 눌러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순간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윈도우 환경에서 Chocolatey로 뭔가를 인스톨하려 할 때 'y'라고 쳤더니 'Say Yes'라고 튕겨내서 당황했던 생각도 났습니다.

앞에서 분명 소소한 이야기라고 정의하려 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소소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버리게 된 것은 '박승휴 망해라' 때문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였습니다. 이유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 순식간에 광속한계에 다다른 존재들의 우주로 저를 날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 마음은 대기권을 돌파할 준비도 안 됐는데 이미 세계는 광속으로 움직이며 광속을 증가시킬 궁리를 하는 범 우주적 존재들 한가운데로 달려나가고 있었거든요. 얼마 전 읽은 삼체의 저광속 세계와는 또다른 범우주적인 거대함과 또 한편으로는 박승휴가 망하길 바라는 찌질함이 잘 어우러진 인상깊은 이야기였습니다.

책 제목과 같은 토끼의 아리아는 아마도 앞으로 더 읽게 될 작가님의 책 속에 나올 캐릭터의 탄생을 지켜봄과 동시에 이야기 진행에 가슴이 답답해져 잠깐씩 멈추고 한숨을 내쉬길 반복했습니다. 4차원 얼굴은 이야기에 나온 대로 그 그림의 기묘함에 빠져들 뻔 했지만 문득 현대 세계에서 이미 4차원 사진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는 소설보다 더 빨리 광속한계사회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싶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당장 구글 이미지검색에 'Panorama Fail Cat'이라고 입력하면 나오는 이미지 중 앞뒤로 길고 다리가 여럿 달린 고양이로부터 3차원 공간을 2차원 이미지로 나타내되 4번째 차원에 시간을 덧입힌 이미지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시간 대비 정보량이 크지 않다는 이유로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닙니다. 한 시간 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몇 줄로 요약할만한 내용을 그렇게 긴 시간을 들여 전달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좀 짜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짧은 개념을 설명할 때 개념의 발상과 역사적인 발전, 현대의 응용에 이르는 시간에 따른 설명방식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에 건축에 별 관심이 없고 기껏해야 직업적인 관점에서 망한 인테리어디자인 사례를 보며 내가 참여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는 그런 실수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 막을 수는 없으므로 - 고민하는 수준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점 웹사이트에서 이 책이 지나갔고 한동안 소설을 읽었으니 뭔가 다른 책을 읽어 기분전환을 해보자 싶어 골랐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건축물의 구성요소를 챕터 별로 늘어놓고 각각의 역사적 발전과 현대적인 응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가령 고층건물, 재료, 엘리베이터, 기반, 지하시설, 상하수도, 다리 같은 주제로 챕터가 나뉘어 있고 각각을 설명하는 식입니다. 어느 정도는 앞에서 다큐멘터리나 다른 책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들을 시간 순으로 늘어놓고 발전 과정을 연결해서 보여주는 책이나 영상은 정말 오랜만에 봐서 흥미로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이야기할만한 체험을 했는데 하나는 현대의 아파트와 비슷한 로마 제국의 공동주택인 인술라를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크레인을 설명하는 부분이어서 인술라를 묘사하는 그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0년에 가까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 이집트와 함께 로마 한복판을 내 아바타를 이용해 걸어본 기억이 났습니다. 그 게임에 묘사된 이집트도 인상적이었지만 로마 역시 기억이 뚜렷하게 남았고 책에서 설명하는 제국의 공동주택의 겉모양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다른 한가지 체험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며칠 있다가 회사에서 컴퓨터를 켜고 윈도우에 로그인하려는데 잠금화면에 브루클린 다리가 나왔습니다. 평소같았으면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로그인하고 넘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책에서 그림을 봤고 또 설명을 봤습니다. 그 다리가 어떤 시련을 딛고 건설된 것인지 배경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로그인을 잠깐 멈추고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인술라와 브루클린 다리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만한 주제였지만 이 책을 매개로 체험이 완성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네이비씰 승리의 기술

평소같으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만한 흔해빠진 자기계발서 제목이었습니다. 서점 웹사이트 첫화면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똑같은 생각을 했고 바로 주의를 다음으로 돌렸습니다. 자기계발서에 가진 제 이미지는 벨 에포크 시대나 2차대전 이후 미국 혹은 버블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발전하는 경제와 사회에서 개인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책일 뿐이었습니다. 책에서는 개인이 헌신에 대한 댓가를 얻는듯히 묘사되지만 따지고 보면 개인들은 경제가 팽창하던 시대에 자산형성기를 겪었기 때문일 따름이었습니다. 개인의 헌신과 보상은 인과와 상관을 헛갈리고 있었고 그런 똑같은 책을 몇 번 보고 나서는 제목부터 개인의 헌신을 요구하는 책은 피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주변 분들이 이 책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골랐다가 예상보다 훨씬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반신반의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에서 이미 밝힌 대로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익스트림 오너십은 지금까지 알려진 여느 오너십의 기초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업무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나를 중심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책임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의깊게 행동하되 담대하고 저돌적으로 움직이고 때로는 교활해져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현대 경영과 관리의 모든 것이 전쟁의 역사와 군사시스템으로부터 온 것을 생각해보면 이 책이 특수전 장교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도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이 책을 통해 의미있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전략을 항상 이 책과 같은 시각으로 접근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하루하루는 훌륭할 테지만 행복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마치 회사 시스템에 하루하루 표시되는 쉰내 터지는 명언과 같이 전쟁과 동떨어진 세계에 이를 그대로 접목할만한 일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마치 영화 허트 로커에서 거대한 선반을 가득 채운 씨리얼 상자 앞에 좌절하는 주인공처럼. 이 책은 전쟁의 세계로부터 왔고 우리 삶의 일부가 그와 비슷하며 이 책이 의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줬고 또 책을 다 읽고 난 다음날 하루를 온전히 이 책의 연장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후 당장 어처구니없는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며 '과연 이 사람이 우리가 망하자고 이 이야기를 했을까?' 하는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일상을 이 책의 자세로 대하는데 조그만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일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업무성과가 뚜렷하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의심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읽은 책을 생각하다보니

삼체 3권의 마지막 장면에서 청신의 결정을 한동안 생각해봤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청신은 자신의 짧은, 하지만 인류 입장에서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을만큼 긴 생애에 걸쳐 인류의 입장에서 볼 때 잘못된 선택을 반복해 왔습니다. 그리고 소우주에 대한 그 사람의 마지막 결정 역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지구인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의 이전 결정과 별로 다르지 않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AA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메시지를 남기고서도 수 천만년이 흐른 시점, 이미 인류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을 뿐 아니라 AA가 문명을 만들었다 해도 그 문명이 번성하고 쇠퇴해 완전히 사라지고도 충분한 시간이 흐른 이 마당에 청신 일생의 의지에 따라 대우주로 돌아가려는 결정에 이미 사라지고 없는, 또 인류의 마지막 내내 자신들의 운명을 타인에게 의탁하던 인류 따위가 말을 보태서는 안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대우주로 돌아가는 청신의 앞날이 마치 게임 노맨즈스카이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기록: 9월, 8월, 7월, 5월, 3월, 2월, 1월

blog/books-read-in-september.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09-29 17:32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