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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읽음

결론

  • 무슨 짓을 해도 회의자료는 안 읽고 들어온다.
  • 읽고 들어오도록 하는 대신 안 읽고 들어온 사람들에 대응하자.

오래 전에 한 임원이 주최하는 회의에 한동안 들어갈 일이 있었습니다. 인상적인 점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회의를 하면 아무도 자료를 읽지 않은 채로 들어와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회의 일정은 하루이틀 전에 보내고 회의 시간도 일부러 아침 일찍이 아닌 시간대로 신경써서 골랐습니다. 그렇게 확보한 시간에 미리 읽고 오시라고 자료를 첨부하고 혹시나 첨부한 파일이나 링크를 안 읽거나1) 못 읽을 경우2)를 대비해 메일 본문에 요약도 해 놓지만 시간과 장소만 보고 그 시간에 나타나는 것3)을 초과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뭐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일을 부탁하는 입장이라 함부로 심기를 거스르기도 어려웠습니다. 결국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문서를 읽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문서를 스크롤하며 빠르게 요약하는 잔기술이 생겼습니다. 같은 문제를 고민하던 누군가는 회의 때 사용할 전용 프리젠테이션을 만들기도 하던데 위험해보여서 따라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문서가 두 벌이 되어 둘 다 관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거든요.

그런데 이 회의는 좀 달랐습니다. 들어가자마자 “다들 읽고 왔죠? 바로 이야기합시다.”로 시작했습니다. 재빨리 참석자들의 눈치를 훑었는데 일부는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인쇄물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습니다. 정말로 이번에도 미리 안 읽고 들어왔을까 싶었지만 그건 제가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모두의 침묵이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회의를 할 때마다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빈 손에 스마트폰만 들고 들어온 사람들은 이 회의에서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하고 기왕에 만난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미리 고민하지 않은 상태로 방에 들어옵니다. 애초에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정보수준부터 맞춰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회의 시간을 줄이자며 회의실마다 시계를 갖다놓고 필요한 사람만 초대하자거나 미리 자료를 공유하자는 등의 수칙이 적힌 코팅된 종이가 회의실에 굴러다니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상황에 대처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고 위에 이야기한 문서를 스크롤하며 이 사람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항목 몇 가지만 빨리 이야기하며 회의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얼마 전에 아마존의 이상한 회의문화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글은 아마존의 성장을 소개하는 책을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인상적이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회의 전에 회의자료를 만들 때 프리젠테이션을 지양하고 여섯 페이지짜리 산문 형태의 문서를 준비하는 겁니다. 문서는 회의의 사전지식, 현황, 목표, 실천방안, 방안에 따른 장단점 등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알고 있어야 할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야 합니다. 이 문서를 얼마나 잘 작성하느냐에 따라 회의의 퀄리티가 달라집니다. 다른 하나는 회의를 시작한 다음에 이 문서를 읽는다는 점입니다. 일단 다 같이 문서를 나눠갖고 처음 십여분동안은 문서를 읽는데 시간을 보냅니다. 누군가가 프리젠테이션을 띄워놓고 설명하는 동안 중간에 생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설명을 중단시킬 필요 없이 한번에 문서를 끝까지 읽고 지식수준을 맞춘 다음에 이야기를 시작하면 회의에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심지어 제프 베조스가 들어오는 회의조차 문서를 안 읽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을거라는데 생각이 미치면서 회의 참석자들이 문서를 안 읽고 들어온다고 화낼 일이 절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쯤 되면 본능입니다. 회의 자료를 전혀 안 읽고 들어와서 이미 공유한 자료에 포함된 설명을 요구하는 것. 제프 베조스라고 하면 그냥 옆집 아저씨같은 느낌이지만 좀더 우리들이 다니는 회사 용어로 바꿔 쓰면 대표님이 주제하는 회의조차 자료를 안 읽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대표님이 세계적으로 이상한 회의문화로 알려진 회의를 시작한 다음에 다 같이 문서를 읽는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 아닐까 의심해봅니다. 대표가 들어가는 회의조차도 이모양인데 하다못해 일을 부탁하는 다른 부서 사람이 주제하는 회의에 문서 좀 안 읽고 들어온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몇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문서를 스크롤해가며 주요 부분을 설명하는 것, 이 설명에 대비해 문서를 만들다 보면 정말 중요한 점 위주로 목차를 구성하게 됩니다. 또 회의 주제와 문서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상황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이해한 채로 회의를 시작할 수 있고 내 의도 대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제프 베조스도 실패한 일을 나도 똑같이 도전해 고통받지 말고 빨리 포기한 다음 상황을 이용합시다.

1)
링크 클릭에 이탈률이 높음
2)
환경에 따라 파일을 못 열 수도 있음
3)
사실은 나타나기만 해도 다행임
blog/did-not-read.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12-21 23:04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