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사이드바

blog:feeling-of-growth

성장감

특히 모바일게임을 만들면서 초반 성장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다른 기계로 플레이하는 게임에 비해 초반 이탈이 극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초반에 이탈한 고객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두 번째 기회는 없어요. 그렇다 보니 회사의 누구라도 초반 이탈을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 특히 초반 성장감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실은 이탈을 줄일 다른 부분이 더 있지만 이해관계가 단단하게 뭉쳐 사실상 일단 게임이 시작된 다음 초반에 신경쓰는 것 이외에는 개발팀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도 합니다.

몇몇 모바일게임을 플레이해보면 첫 부분이 공식처럼 비슷합니다. 굉장한 컷씬. 최소한 하늘을 나는 용이 불 정도는 뿜어주거나 완전 많은 병사들이 서로 치고받거나 뭔가 거대한 건물이 불타며 무너져내리거나 나중에 레이드보스로나 나올 것 같은 보스가 갑자기 나타나 나와 치고받아야 하는 정도로 대단히 중요하고 긴박한 상황에 플레이어인 나는 이미 충분히 강한 동시에 이 게임의 상황을 이끌어가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받았으며 유저인 내가 할 일은 플레이어캐릭터를 이동시켜 공격 버튼을 연타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인트로가 지나고 나면 뭔가 작은 행동을 할 때마다 짧은 퀘스트 시작과 끝이 반복되며 자잘한 보상을 짧은 간격으로 계속해서 주기 시작하고 내가 정확히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업적을 달성하고 업적은 게임 내부와 구글플레이 양쪽에서 동시에 나타나 나를 칭송해줍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퀘스트를 따라 필드에 나가 몬스터를 때리기 시작합니다. 플레이어는 초반에 빠르게 성장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레벨이 오르고 능력치가 오르며 플레이에 따라 빠른 속도로 아이템을 교체해 갑니다. 플레이어캐릭터 외에 아이템 역시 성장의 대상인 경우가 많지만 초반부터 아이템 성장의 깊고 어둡고 찐득한 세계로 플레이어를 빠뜨리는 실수를 하지는 않습니다. 아이템 성장의 존재를 인터페이스로 알 수는 있지만 고맙게도 초반 지역 몬스터들은 자신이 사용하지도 않는 아이템을 들고있다가 드랍하거나 맥락은 없지만 퀘스트 보상으로 그때그때 내 초반 레벨과 클래스에 맞는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빠르게 강해진 나는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마주쳤던 불을 뿜던 용과 암만 생각해도 레이드보스인 그 녀석을 찾아 다음 마을과 그 주변의 새로운 필드로 이동합니다.

다음 필드는 이전 같지 않습니다. 이전에 플레이하던 필드와 달리 몬스터를 쓰러뜨리는데 이전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이전에는 다섯 대 때리면 쓰러지던 몬스터들이 이제는 열 대도 넘게 때려야 쓰러질 뿐 아니라 아슬아슬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중간에 포션을 써야 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이쯤 되니 몬스터 한 마리로부터 얻는 경험치량이 신경쓰이기 시작하고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는 단위시간 당 경험치량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분명 대미지플로터에 찍히는 숫자는 더 크게 펑펑 터져 주고 내가 사용하는 스킬은 번쩍여 내 눈알을 뽑아버릴 기세이며 마을 사람들은 내가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대기업 회장님인 것 마냥 칭송에 마지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전에 비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인게임 비용을 들여 사냥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파밍시뮬레이터를 플레이할 때 나는 점점 더 넓은 토지를 경작하며 더 많은 농기구와 더 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있지만 통장 잔고는 서서히 줄어들어가는 그런 느낌과도 비슷합니다. 어느 순간 현타가 찾아오고 나는 나를 칭송해주는 이 세계에 남아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갈 지 아니면 강력한 아이템으로 온몸을 두른 내 분신을 이 세계에 남겨두고 떠날지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성장감은 중요합니다. 너무 당연하고 중요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웃깁니다. 특히 초반에 고객들이 게임에 만족하고 이 세계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초반 성장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동안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에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성장이 더 자주 일어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장을 위해서는 보상이 필요했고 보상 역시 더 자주 일어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능한 모든 보상 시스템을 동원했습니다. 퀘스트를 짧은 간격으로 끊어 보상을 지급하고 초반에 간단한 업적 여러 개가 차례대로 달성되어 빨간점을 띄우고 누르기만 하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여러 자원을 얕은 맥락을 통해 바로바로 제공해줍니다. 퀘스트 몇 개를 짧은 시간 안에 플레이했을 뿐인데 이미 만렙을 달성한 것 마냥 번쩍이는 효과와 함께 레벨이 오르고 새로운 성장시스템 일곱 개가 빨간점과 함께 나타납니다. 그런데 다들 이렇게 초반의 경험을 압축하다 보니 작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모든 경험이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 분명 텐션은 높지만 이게 성장인지 뭔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진 겁니다.

성장감은 이전 상태와 현재 상태를 비교할 수 있을 때 느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동네 고개를 이전에는 8분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오늘은 블랙아웃이 오기 직전까지 페달을 밟은 결과 7분 40초에 올라갔다면 이 때 성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게임도 마찬가지인데 이전에는 포션 2개를 써 가며 거의 30초 가까이 때려야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어느 날은 포션이 필요없어지고 또 어느 날은 새로 배운 스킬 하나를 섞어 공격하니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쓰러집니다. 이 때 성장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위에 이야기한 초반 경험에서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더 빨리 다음 경험을 하기를 부추깁니다. 더 빨리 레벨이 오르기를 원하고 이보다 더 빨리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 더 강한 몬스터를 상대하고 더 빨리 아이템을 성장시키고 더 빨리 강력한 던전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컨텐츠의 난이도는 가파르게 올라가고 플레이어는 성장감보다는 오히려 세계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지 느끼게 됩니다. 제대로 된 성장감을 통한 성취감과 이 세계에 대한 애착을 느끼기도 전에 현태가 찾아오고 고객이 살아가는 실제 세계와 마찬가지로 쉽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작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최근에 출시된 리니지2M을 플레이하면서 이 초반 성장감을 만드는 방법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십 수년 전에는 초반에 이렇게 많은 퀘스트와 업적으로 플레이어를 요즘처럼 강한 텐션으로 잡아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느슨하게 사냥터에 내보내고 필드에서 몬스터들을 상대하되 더 빨리 다음 지역의 더 강한 몬스터와 던전과 길드로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같은 필드에 훨씬 더 오래 머물게 했습니다. 사실 그 시대에는 필드와 몬스터를 추가하는데 지금보다 비용이 컸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한 필드에 오래 머물면서 성장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경험치량은 퍼센트로만 표시되고 몬스터의 남은 체력이나 내가 주는 대미지량이 직관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플레이어는 이전에 비해 떨어진 포션을 채우러 마을로 돌아가는 간격이 점점 더 길어지고 몬스터 한 마리를 공격하는 시간이 훨씬 짧아졌음을 느낍니다. 같은 몬스터로부터 이전에 비해 플레이어캐릭터가 더 강해졌음을 뚜렷하게 느낍니다. 그 후에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더 강한 몬스터들을 만날 때 위에 이야기한 다른 게임처럼 좌절하는 대신 납득합니다. 여기는 다른 필드니까. 여기서 나는 약하지만 이전 필드에서 강해지는 경험을 해봤으니까. 비슷한 요령을 여기서도 강해질 수 있으리라 충분히 기대합니다.

문득 모바일 게임의 초반 리텐션과 성장감을 만들며 한동안 실수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쉴 새 없이 플레이어의 주의를 끌며 온갖 자잘한 보상과 성장을 보여주는 토스트와 보상 팝업과 레벨업 이펙트는 높은 텐션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장감을 주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문득 십 수년 전 우리 선배들이 하던 보다 전통적인 장치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모바일 게임 개발의 거칠고 황량한 세계에 던져진 것이 아닐까 하는 현타를 느끼며 이제 성장감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좀 더 고민해볼 작정입니다.

blog/feeling-of-growth.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12-15 13:31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