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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game-design-ethics

게임디자인 윤리

제목과 별 관계 없는 앞부분을 건너뛰려면 페이션트 원 미션부터 보세요.

히트맨

이 세상에 히트맨이라는 게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어쩌다 이 게임을 알게 됐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프랜차이즈 중 일부가 왜 내 스팀 라이브러리에 나타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곤란하도록 무료한 시간을 못 이긴 궁금함으로 게임을 설치해봤지만 정말 오래된 게임처럼 보였고 몇 분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습니다. 마치 저 유명하고도 위대한 툼레이더 프랜차이즈의 첫 번째 게임을 실행했다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블리자드 페이스팜'을 하던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히트맨 프랜차이즈 게임을 영원히 플레이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히트맨2의 확장팩 스테이지 중 하나인 'Last Resort'를 플레이한 감상1)을 읽게 됐습니다. 글은 충분히 흥미를 끌고 있었고 첨부된 영상들도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스팀에서 찾아보니 신기한 방식으로 팔고 있었는데 요즘 게임답지 않게 첫 스테이지를 데모로 공개해놓고 나머지 스테이지를 따로따로 구입하거나 스테이지 일부를 묶어서 판매하거나 전체를 한번에 구입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상품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상품이 너무 많아서 내가 원하는 스테이지가 포함된 패키지가 뭔지 한참을 쳐다봐야 했고요. 일단 데모로 공개된 첫 스테이지를 첫번째 주말 내내 플레이했습니다. 내 목표는 쉽게 암살할 수 있었지만 오랜 옛날 데모 게임의 첫 스테이지를 씹고 뜯고 맛보며 온갖 방법으로 가지고놀기를 반복하던 경험과 비슷해 신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렇진 않았지만 마치 게임을 종료할 때 구입 문의 전화번호가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히트맨2 데모를 마르고 닳도록 플레이한 다음 본편을 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그때 구입한 스탠다드 에디션에는 확장팩에 포함된 'Last Resort' 스테이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몇 시간 후에는 알게됐지만요.

그 후로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플레이했습니다. 목표를 한번, 또 한번 암살할 때마다 게임은 새로운 헛점을 슬쩍슬쩍 내보이며 다음 플레이를 유도했습니다. 히트맨의 세계는 실제 세계와 비슷하지만 그런 구조물에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놓은 헛점은 마치 퍼즐처럼 제가 똑똑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했습니다. 한동안은 목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거하는데 몰두하고 그 다음에는 목표 이외에는 아무도 죽이지 않는데 몰두했습니다. 오랜 시간 플레이한 나머지 눈을 감으면 뒤통수에 바코드가 그려지고 길 가다가 다른 사람 뒤통수만 보면 Q를 눌러야 할 것 같았습니다. 뭄바이에서 목표들을 제거한 다음 동전 두 개가 없어 택시를 못 타고 걸어서 탈출하며 다이애나에게 '아 진짜 너무하네. 돈좀 넉넉히 줘라'라고 육성으로 말하기도 하고요. 결국 확장팩을 샀고 또 리메이크 스테이지도 샀습니다. 각각을 마르고 닳도록 플레이했고요.

페이션트 원 미션

히트맨2 리메이크 스테이지는 묘하게도 전작의 스테이지를 최신 환경에서 다시 제작한 것들입니다. 전작의 설정과 배경에 히트맨2의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레벨은 히트맨2에서 경험한 것에 비해 좁고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며 레벨디자인 철학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같았고 꽤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가된 미션에는 '페이션트 원'이라는 4개짜리 미션 팩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 세계에 위험한 바이러스를 사용한 테러를 계획한 목표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방콕의 아름다운 야경을 목표에게 접근해 가며 호텔 밖 창문을 통해 잠깐씩 훔쳐봤습니다. 방콕엔 가본 적 없지만 가보게 된다면 꼭 야경을 보고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이탈리아와 미국을 거쳐 마지막 스테이지인 홋카이도에 도착했습니다. 만족스러운 게임플레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페이션트 원' 스토리의 마지막 스테이지인 홋카이도는 설정 상 위험한 바이러스의 첫번째 감염자이자 숙주가 기거하는 홋카이도 어딘가의 강력한 격리시설에 잠입해 '페이션트 원'과 현재의 담당의를 암살하는 겁니다. 강력한 격리시설 답게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외부인의 침입에도 강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느 히트맨 스테이지답게 삼엄한 보안 속에서도 곳곳에 예쁘게 만들어놓은 헛점이 게임플레이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브리핑에서 이야기했지만 대강 듣고 넘어간 바이러스의 존재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바이러스의 개발자이자 현재 숙주인 오웬 케이지는 강력하게 격리돼 있었지만 나머지 NPC들이 이동함에 따라 시설에 바이러스가 퍼집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는 것은 저 자신도 포함되고요.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부주의하게 움직이는 스탭들을 적절한 방법 (주로 망치로 머리를 내리침) 으로 통제해 물리적 헛점을 통해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하고 나 자신 역시 방호수단을 찾아야 (빼앗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플레이를 익히기 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잠깐 다른 경비원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 바이러스가 아랫층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NPC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마주쳐 지나가는 사이 시설에 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퍼져버렸습니다.

얼른 근처에 있던 방호복 입은 누군가를 렌치로 때려눕히고 방호복을 주워 입었습니다만 맵을 살펴보니 오웬 케이지 외에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든 사람들이 목표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다이애나는 통신으로 어쩔 수 없이 감염자들도 처치해야 한다고 말해줬습니다. 이 상황은 제가 디자이너가 요구하는 게임플레이를 늦게 눈치챘고 또 디자이너가 의도한 압박에 빠르게 반응하지 않은 탓입니다. 아마도 언어에 좀 더 익숙했다면 브리핑에 지나간 바이러스의 특징을 좀 더 마음에 담아뒀을 겁니다. 또 바로 앞 스테이지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병사들을 저격해봤으니 이런걸 짐작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계산된 압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저에게 게임은 강한 패널티를 부여했습니다. 이제 암살 목표는 두 명이 아니라 수 십 명이었습니다.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려면 이 많은 목표를 다 죽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별로 특별한 플레이는 아닙니다. 비디오게임의 여명기에는 나치에게 총을 쐈고 또 괴물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좀비들에게 총을 쐈고 게임 속에서 나와 같이 총을 든 동업자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이렇게 총을 쏘는 대상에게 의미있는 설정을 부여한 이유는 이제는 더이상 특별하지도 않은 플레이이지만 이 안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인 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득이하게 게임 속에서 내가 총을 쏴야 하는 대상이 같은 인간이더라도 최소한 게임 속의 나와 똑같은 동업자였습니다. 다만 나와 같은 편이 아니어서 내 총알을 맞아야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사람 모양을 한 상대는 좀비로 표현됐습니다. 그 온갖 게임의 수많은 좀비들은 좀비를 총으로 쏘는 게임이 인기있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은 좀비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총으로 사람을 쏘는 게임이 윤리적인 한계 안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트맨의 이 홋카이도 미션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목표로 바뀌어 내가 죽여야만 하는 상대가 되지만 이들은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었고 총을 든 나를 보고 도망쳤습니다. 이들이 다른 상대와 다른 점은 목표로 표시된다는 점, 가끔 기침하는 애니메이션을 재생한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노 러시안' 미션에서는 최소한 내가 테러집단에 잠입한 정보기관의 요원이고 어쩔 수 없이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테러에 동참하는 설정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미션의 끝에 나 자신이 테러집단의 수장에게 발각되어 제거당하며 끝납니다. 이런 설정에는 결코 이런 행동들이 정당화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된다는 메시지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는 방호복을 입고 무기를 든 압도적으로 강한 입장의 암살자이고 내 앞에 남은 사람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명인가를 죽이다가 '맨헌트'를 잠깐 플레이할 때 느끼던 두통과 구토감을 느껴 게임을 그만뒀습니다. 그렇게 페이션트 원의 홋카이도 미션은 클리어하지 않은 상태로 남았고 또 그렇게 신나게 플레이했던 히트맨2 역시 더이상 플레이하지 않은 채로 남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패널티 디자인은 제게 놀랍도록 강한 압력을 가한 셈입니다. 시설 내에 바이러스가 퍼질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제게 그걸 최대한 빨리 막을 강력한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실패할 때 제가 받을 패널티는 충분히 강력하지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게임디자인의 윤리적인 측면을 벗어나버렸습니다. 애초에 이 게임디자인이 매스 슈팅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혹시 그렇게 해석될 여지를 줄이기 위해 감염자를 좀비로 표현하고 엄브렐러사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괴물로 만들고 민간인에게 총을 쏜 내 얼굴에 총구가 들이대지며 나와 똑같은 무장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었어야 합니다. 비디오게임을 개발하는데 그 정도의 디자인 윤리는 지켜야 합니다. 의도든 아니든 이 디자인은 그 윤리를 지키는데 실패했습니다.

blog/game-design-ethics.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11-17 19:45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