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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토리얼

너절한 이야기 대신 결론으로 바로 넘어가세요.

미신

게임 튜토리얼 하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미신 같은 이야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게임의 핵심을 잘 설명해야 한다는 것. 실제로 그런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과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가령 글을 쓸 때 독자를 예상해 그들에게 맞는 표현을 사용하라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하다못해 팀에서 기획서를 작성할 때도 그 기획서를 읽을 사람이 어떤 직군인지, 심지어는 누구인지에 따라 설명 방법이나 설명 순서를 바꾸는 요령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독 튜토리얼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반사적으로 되뇌이는 상황이 올바른지 의심해보게 됐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게임에 익숙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튜토리얼의 미신에 따라 게임을 처음 해 보는 사람이 게임을 실행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실제로는 일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 만든 튜토리얼은 게임의 주 고객들을 좌절시킵니다. 가령 현대의 모바일게임에 익숙한 사용자가 게임을 시작한다 칩시다. 이 사용자는 이미 게임 시작 전에 나오는 뻔하디 뻔한 컷씬을 생략하고 빨리 메인화면으로 넘어가 어떤 컨텐츠들이 있는지 눌러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컷씬에 섞여있는 망할놈의 튜토리얼은 나에게 화면 왼쪽 아래에 있는 가상패드를 움직여 캐릭터를 몇 발자국 걷게 하고 또 오른쪽 아래에 있는 아직 하나만 열려 있는 허접한 스킬버튼을 몇 번 눌러보게 합니다. 아니 이런건 오늘 아침에 플레이한 게임에도 똑같이 하던 동작이니까 이제 그만 넘어가줬으면 싶지만 튜토리얼을 끝내기 전에는 게임이 다음으로 넘어가질 않습니다. 이 튜토리얼이 길어질수록 사용자는 이 과정 자체에 좌절합니다. 루프물 장르의 영화나 소설에서 반복되는 상황을 끝없이 견디는 주인공은 일반인들에겐 없는 강력한 멘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인 우리 사용자들에게 이미 수 십 번은 반복했을 똑같은 동작을 가르치는 튜토리얼을 또 시키면 이들은 정신이 붕괴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더이상 못 견디고 게임을 꺼버릴 겁니다. 운이 좋다면 삭제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항상 운이 좋을 수 있는 게임이 얼마나 될른지 모르겠습니다.

먼 미래에 출시될 디아블로4를 생각해봅시다. 부푼 기대를 안고 지난 수 십 년에 걸쳐 마우스와 키보드 조작을 단련한 지금 당장이라도 검지손가락으로 악마를 때려잡을 준비가 된 혈압이 올라 현기증을 호소하는 사람들 앞에 모든 UI를 잠가놓고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몬스터를 클릭하십시오' 같은 튜토리얼을 시도했다가는 포럼이 욕설로 도배되든지 마우스를 부숴버리든지 적어도 둘 중 한가지 사건은 일어날겁니다. 튜토리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게임 장치도 모든 사용자에게 알맞게 구성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튜토리얼, 원숭이도 이해할 수 있는 기획서 같은 것은 전설로만 전해내려오고 그 누구도 실체를 본 적 없습니다. 누군가 이런걸 요구한다면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타겟팅

그 어떤 게임 장치도 모든 사람에게 맞출 수 없기 때문에 튜토리얼을 설계하기에 앞서 반드시 고객을 선택해야 합니다. 애초에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주 고객은 어떤 사람들인지 정의해 둬야 하지만 실제 프로젝트 제안에 너무 쉽게 '우리는 백화점 게임이므로 모든 종류의 고객을 타겟으로 한다'는 엔씨소프트 도서관 바닥에 난 구멍으로 떨어져 2층 나무데크에 처박혀도 시원찮을 소리를 당당히 하는 사람들이 널려있는 마당에 튜토리얼을 제작할 시점 - 안타깝게도 런칭 직전 - 까지 주요 고객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것은 없습니다.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습니다. 게임의 나머지 부분은 핵심 고객을 설정하지 못해 제각각으로 만들어져 결국 게임에 가장 익숙한 고객들만이 접근하게 되겠지만 적어도 튜토리얼만은 이 참사를 벗어날 가능성이 아직은 있습니다. 이 튜토리얼을 플레이할, 이 튜토리얼에서 이탈하지 않고 무사히 메인화면에 도달할 혹은 도달해야만 하는 고객들이 어떤 사람인지 정합니다. 가령 이미 그 고객의 폰은 왼쪽 아랫부분을 하도 눌러대서 화면이 변색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캐릭터를 움직여보라고 하면 혈압이 올라 폰을 내던질겁니다. 이들에게는 - 만약 게임에 그런게 있다면 - 전투나 스킬시스템의 특징, 핵심 성장구조 정도를 알려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둘러보게 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튜토리얼을 만드느라 시간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고 이미 다 아는 것을 몇 분에 걸쳐 멍청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튜토리얼에 좌절하지 않아도 됩니다.

너절하게 이야기했지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결론

  1. 모든 고객을 만족시키는 튜토리얼은 부두다. 이런 주장을 들으면 도망쳐라.
  2. 고객은 프로젝트 시작 단계에 이미 특정되어 있어야 한다.
  3.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는 수 없이 튜토리얼 제작 전에 이 튜토리얼을 통과할 고객을 특정해야 한다. 이미 도망치기엔 늦었다.
blog/game-tutorial.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11-25 11:54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