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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십

얼마 전에 정말 운 좋게도 회사에 들어온 이력서 중 저와 비슷한 직군에 지원하신 인턴십 지원자님들의 이력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 임무는 이 이력서를 검토해서 면접을 진행할 분들을 추리는 것이었습니다.

종종 구인을 할 때 과연 우리가 구인하기에 당당한 처지일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객들과 관계가 아주 좋은 편은 아니고1) 또 대한민국 법률을 준수하지만 노동조건이 훌륭한 편도 아닙니다.2)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는 좋은 게임디자이너님들의 깊은 고민이나 높은 비전과는 거리가 있는 보다 보수적이고 상업적인 개발을 합니다. 이런 우리들이 당당하게 우리와 함께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싶었습니다. 언젠가 온라인에 '나와 같이 일할 분을 찾는다'는 멋진 글을 올려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구직 웹사이트를 빌어 구인을 하곤 했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상황을 분명 고객들이 모르는 바 아닐 테고 아직까지는 고객에 더 가까울 인턴십 지원자님들의 문서를 보며 황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비루한 저희 프로젝트와 직군에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편 통계적인 의견을 가질 만큼 아주 많은 이력서를 본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본 문서들에 한해서는 생각해볼만한 두 가지 주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를 적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경험 차이, 다른 하나는 비슷한 커리큘럼의 결과로 추측하는 거의 같은 구성의 포트폴리오 문서입니다.

이력서에는 학교를 기재해야 하므로 지금 대략 어느 동네에 살고 계신지 큰 범주로는 알게 됩니다. 문서를 검토하다 보니 수도권과 비수도권에 계신 지원자님들의 경력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꽤 높은 비율로 서로 다른 경험 기회가 주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흔적을 느꼈습니다. 대회, 공모전, 전시회 경험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서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하고 또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 시대에 우리들이 실제로 상업용 게임을 개발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게임 엔진을 사용한 개인 혹은 소규모 개발 경험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개발을 어느 정도 진행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특히 공개 시점을 정해놓고 그 안에 어느 정도 이상의 완성도를 내야 하는 공모전이나 전시회는 아직 자신들의 퍼포먼스나 개발 중에 겪게 될 여러 가지 한계를 맞이할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기 쉬운 지원자님들께 굉장히 큰 도전과제입니다. 그런데 이 경험이 주로 수도권에 계신 분들로부터는 비교적 자주 나타났지만 비수도권에 계신 분들로부터는 비교적 드물게 나타났습니다. 정확히 숫자를 세어볼까 하다가 그 행동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이게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 시대에도 지리적인 특성이 지금까지의 경험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지 의심헤볼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여러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비해 비디오게임은 여전히 충분히 학문으로 정착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영화는 긴 역사와 함께 미리 공부하기에 충분한 교과서가 있고 이를 가르치는 어느 정도 정규화된 교육과정과 교육기관이 있습니다. 이제 비디오게임 개발 분야도 유명한 교육기관이 나타났지만 교과서를 만들거나 커리큘럼을 정규화해 교육할만큼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 않고 또 성장산업인 덕분에 동향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정규화 자체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을 처음 시작할 무렵과 달리 학교에 '게임' 타이틀을 단 학과나 전공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교육과정이 나타나고 한동안은 커리큘럼을 눈여겨봤습니다만 제 스스로가 게임 개발을 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잘 몰랐고 이를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 제시하는 커리큘럼 역시 기존의 전산학으로부터 보다 현대적인 소프트웨어 사용 스킬에 가까운 과목으로 채워져 있어 이 과목들을 수강한 다음 일을 시작할 때 얼마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커리큘럼은 몇 년 동안 정체된 상태였고 저 역시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현대에는 나름대로 주로 영어권 국가들과 한국의 게임 역사가 어느 정도 쌓였을 뿐 아니라 주요 상용 엔진이 업계 표준으로 정착 되었으며 이들이 요구하는 스킬 역시 상당 부분 표준화되어 이를 바탕으로 아예 개인이나 소규모로 개발을 시도하는 커리큘럼이 나타났습니다. 자기소개서에는 이 커리큘럼을 통해 우리들도 좀 더 스케일이 클 뿐 비슷하게 겪곤 하는 좌절과 환희의 순간이 언급되곤 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돈을 받으며 일을 시작하고 나서 겪게 될 온갖 괴상한 일들을 조그맣게 먼저 맛보고 이 일들이 눈앞에 닥칠 때 좋은 판단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겁니다.

그런데 이 커리큘럼들이 어느 정도 학교마다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봤습니다. 우리들이 허구헌날 조그만 규칙을 하나 만드는데도 시장의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전에 내린 결정을 참고하기 위해 '경쟁 게임'들을 지독하게 조사하는 마당에 커리큘럼을 만드는 학교에서 다른 학교들의 커리큘럼을 참고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서로 비슷해지고 지도 가이드라인도 어느 정도 비슷해졌을 겁니다. 지원자님들이 제출해주신 어떤 문서는 본인의 작업의 배경과 의도, 진행 과정, 결과, 이로부터 얻은 교훈을 정리하지만 다른 지원자님들이 제출해주신 문서들은 시장에서 이미 서비스 중인 게임의 일부를 비슷하게 분석하고 비슷한 관점으로 바라보며 비슷한 패턴을 통해 구조를 서술합니다. 문서의 구성, 목차, 서술방식이 비슷하고 플로우차트나 데이터테이블에 이르러서는 숫자로 된 식별자3)마저도 비슷합니다. 문서를 작성할 때 대상으로 삼은 게임과 대상으로 삼은 게임의 각 부분이 조금씩 다르지만 심지어는 문서의 길이마저 비슷함을 깨달았을 때 '어 잠깐만…' 하고 앞에서 이미 보고 지나온 지원자님들의 문서 각각을 모두 다시 열어 지금 이야기한 여러 요소들을 비교해보기에 이르렀습니다.

학계에서도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일관된 형식과 방법이 있고 이는 지식의 공유를 원활하게 도와줍니다. 우리들 역시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문서와 시스템 설계에 일관되게 요구하는 형식이나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같은 형식을 사용하고 거의 같은 플로우차트와 거의 같은 데이터구조를 여러번 반복해서 만날 때 이 분들이 이 분석 도구를 이해했거나 도구의 목적과 이들이 사용되는 맥락을 고민해보셨을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을 학문의 관점에서 좀 더 생각해보고 같은 문서를 작성하셨을 수도 있고 우리들이 학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이해보다는 흉내내는데 가깝게 같은 문서를 작성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서류전형과 면접전형으로 채용 절차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서류전형에서 다른 경쟁자들과 오직 이미 제출해 상태가 고정된 자료만으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 형식과 구성이 거의 같은 문서들 사이에서 스스로의 고찰과 이해 시도가 조금이라도 드러난다면 이쪽에 눈길이 더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지원자님들이 제출해주신 포트폴리오는 어처구니없이 훌륭했습니다. 시대가 흐를 수록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고 후발 주자들이 자기 인생의 비슷한 시점에 이 차이를 극복하고 돈을 받으며 일을 시작하기에 점점 더 불리한 세계가 되는 중입니다. 저희들은 조금 더 세계에 일찍 나타난 덕분에 감히 지원자님들의 문서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만 우리들이 더 낮은 수준으로 시작할 때에 비해 모든 분들이 훨씬 더 훌륭했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업무로써 이 상황에 결과를 제출하고 다음 단계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위에 이야기한 실마리를 통해 실제로 만나볼 지원자님들의 수를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은 항상 폭주한 기관차처럼 진행되는 제작진행 과정 속에 이 업무를 진행하느라 괴로운 점은 분명 있었습니다만 지원자님들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해보고 또 자신과 제가 속한 업계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누추한 저희들과 일하기 위해 지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옆 파티션에서 뵙겠습니다. :)

blog/internship.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0-06-21 09:49 (바깥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