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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life-skills-on-online-games

조상들의 오버테크놀러지

채집시스템이나 생활경험치가 다 무슨 소용인가

최근 출시된 모바일게임을 돌리다가 문득 퀘스트 텍스트를 읽어봤습니다. 어차피 퀘스트 대부분은 자동진행되니 퀘스트 텍스트를 잘 읽어볼 필요는 별로 없었습니다. 때때로 지금 내 캐릭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면 별도로 퀘스트 저널 창을 찾아 그때서야 각 잡고 텍스트를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이 몬스터와 전투하고 있는 이유가 뭔가 싶어 퀘스트 인터페이스에 떠있는 목표를 읽어본 겁니다. 잠깐 당황했습니다. 나는 지금 모래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배경은 사막처럼 보였고 제가 아는 사막은 그 자체가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바닥에 널려있는 것도 모래를 생각하고 만든 그래픽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이곳에 사는 몬스터를 공격해 이들로부터 드랍되는 모래를 가져가고 있었습니다. 당황은 잠깐이고 문득 근본적으로 온라인게임에서 말하는 생활스킬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래를 삽으로 퍼 들고 갈 수 있다고 해봅시다. 먼 옛날 세금과 죽음이 해결된 세계에서 나무를 베고 낚시를 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 게임을 만들었을 겁니다. 광산에서 구리를 캐고 땅에서 흙과 모래를 얻습니다. 모래를 얻으려면 필드에 모래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모래를 수집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행동 역시 게임으로부터 자원을 얻는 행동이므로 무한히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전투가 무기의 내구도와 포션 등을 비용으로 사용하게 만드는 만큼 모래 수집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전용 도구를 사용하게 만들고 도구에도 무기와 같이 내구도가 생깁니다. 이제 모래를 수집하는 플레이어들은 망가질 것을 대비해 예비 삽을 여러 개 들고 다니거나 그 자리에서 삽을 고칠 또 다른 생활스킬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삽을 고치는 스킬은 삽만 고치게 하면 별로 배우고 싶지 않을 테니까 무기와 도구를 모두 고칠 수 있도록 설정합니다. 이제 원활한 전투를 위해 전투스킬과 도구수리 스킬을 모두 배워야 하고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행동을 좋아하는 플레이어와 도구를 수리하는 행동을 더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이 갈라지며 플레이어 한 명에게 이 행동을 모두 요구하는 게임은 누구에게도 맞지 않게 됩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전투로 레벨을 올릴 수 있는데 당연히 모래를 수집해도 레벨을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행동이 같은 레벨을 올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가령 던전은 레벨 제한에 맞춰 설계되는데 플레이어의 레벨이 전투를 통해 성장한 레벨인지 모래수집을 통한 레벨인지 쉽게 파악해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존 레벨에 전투레벨이란 새 이름을 붙여주고 새로운 레벨을 만들어 생활레벨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전투레벨은 던전 출입 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생활레벨을 올려야 할테니 이 레벨에도 쓸모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래를 수집하고 도구를 수리하는 사람들에게 던전에 출입하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그런 사례가 있습니다. 필드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자원을 수집할 수 있는 던전이요. 하지만 이런 서로 명백히 다른 플레이를 만든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MMO 게임에서는 이들이 어딘가에서 다시 마주치게 만들어야만 하는 강박적 관습이 있습니다. 레벨이 높은 던전의 보스는 전설급 무기를 드랍하고 이 무기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전설적으로 생활레벨이 높은 경험 많은 도구를 수리하는 사람 뿐이라는 식으로 둘을 연결해봅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시점에 편리하게 찾을 방법이 없어 한 사람에게 이 모든 역할을 요구하는 모양으로 돌아갑니다. 상황은 복잡해진 채 개선되지 않고 이 상황을 만든 게임디자이너는 고객들로부터, 개발팀으로부터, 경영진으로부터 쉴 새 없이 욕을 먹고 맙니다.

이 모든 문제는 몬스터가 모래를 드랍하게 만드는 순간 해결됩니다. 자동전투 돌리러 온 고객들에게 채집과 제작 등 생활로부터 가져온 시스템을 기존 전투시스템과 아무런 차이 없이 바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아까는 도적단을 소탕하기 위해 전투를 했지만 지금은 모래를 수집하기 위해 전투를 합니다. 또 다른 몬스터를 공격해 나무를 얻어 제작에 사용합니다. 제작한 아이템은 거래소에 올려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대신 재화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생산자와 소비자가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만나고 플레이어 한 명에게 이 모든 시스템을 플레이할 것을 요구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모래를 수집하는 행동은 여전히 포션과 무기를 필요로하므로 비용을 따로 만들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삽을 만들거나 삽질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아도 되고 전투레벨과 생활레벨을 분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몬스터가 채집물을 드랍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해결됐습니다.

하지만 지난 이십여년 동안 시도해 온 온갖 가생세계의 여러 가지 삶을 표현하려던 시도들은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20여년 전에 이 모든 문제가 간단한 발상의 전환만으로 이미 갚히 해결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시스템이 현대 모바일게임의 자동진행 요구에도 잘 부합한다는 사실에 문득 조상들의 오버테크놀러지를 느껴봅니다.

blog/life-skills-on-online-games.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12-21 18:30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