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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보관 문제

전주

벌써 10년이 되어 가는 어느 봄날 저녁에 저는 전주시내의 한 예식장에 있었습니다. 여느 하객들과 마찬가지로 예식에 대한 관심보다는 밤 늦은 상경에 서둘러 밥 한끼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피로연장을 찾았습니다. 여느 뻔한 피로연장과 다르지 않게 수많은 하객들과 이들을 제한된 인원으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먹여야 하는 직원들 사이에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일어난 자리는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치워졌고 비닐로 만든 식탁보가 덧씌워졌으며 가운데 소주 몇 병과 콜라, 그리고 맥주가 세팅됐고 바로 옆에는 몇 사람의 손을 거치며 플라스틱 손잡이가 끈적해진 병따개도 놓였습니다.

집에서 만들어먹자니 고통스러운 예식장 표준 식사메뉴인 잡채와 양념육회를 몇 젓가락 집어먹다가 문득 눈앞에 놓인 맥주를 쳐다봤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맥주하면 떠오르는 후각적 심상이 있습니다. 이런 냄새를 상상해보세요. 어느 초여름날 도시 근교 초저녁. 모래 바닥 위에 기둥 두 개를 세워 고정한 천막 아래에 자투리 나무를 짜맞춰 만든 평상에 비닐장판이 깔려 있습니다. 비닐장판은 실외에 몇 년 동안 방치되며 대부분 빛바랜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뿜어냅니다. 상 위에 지난 장마때 물에 잠긴걸 끄집어낸듯한 냄새를 풍기는 비닐을 깔고 종이접시에 담아낸 눅눅한 파전을 한 젓가락 집어먹으려는데 바닥으로부터 그 자리에 작년부터 골백번은 엎질러진 채 쉬어비틀어진 썩은 맥주냄새가 풍겨오는 겁니다. 한국 맥주는 맥주병을 바라보기만 해도 이런 냄새를 상상하게 됩니다. 이제 평상 앞에서 눈을 감고 벌름거리는 코를 그대로 둔 채 주변에 헤이즐럿 향을 살짝 뿌리면 장소는 순식간에 여느 도심지 지하 1층에 있는 노래방이 됩니다. 잘 맡아보면 어둡고 끈적이는 페브리즈에 쩐 소파 사이에서 어젯밤 술 마시고 누가 토한 것 같은 냄새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하 1층 노래방 안에서 멍하니 쉰 맥주 냄새를 맡다가 순식간에 현실로 불려나온 제 앞에는 이미 종이컵 가득 아까 본 한국 맥주가 담겨 있었습니다. 여긴 천막 밑 평상도 아니고 지하 1층 노래방도 아니니까 뭐 괜찮겠지 싶어 한모금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한잔을 더 비우곤 말했습니다. “어 이거 뭐야” 그리고는 병을 집어다가 한잔을 더 따라 마시고 또 한잔을 더 따라 마시고는 끈적한 병따개를 집어들고 병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 이거 괜찮았습니다. 상상한 맛과 굉장히 달랐고 멀쩡한 맥주맛이었습니다. 멀쩡하다못해 맛있었습니다. 그날 결국 종이컵이 물렁해져 새 종이컵을 써야 했고 마지막 예식인 덕분에 하객이 우리 테이블만 남을 때까지 마셨습니다. 나중엔 부끄러워서 도망치듯 예식장을 빠져나왔고 그제서야 하이트 공장이 전주에 있다1)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맛있었습니다.

판교

회식으로 예약한 돼지고깃집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일행은 드넓은 홀을 가로질러 기둥을 왼편에 두고 꺾어 나온 복도를 한참 지나서야 자리로 안내받을 수 있었고 자리에 붙어있는 번호는 거의 세자릿수에 가까웠습니다. 숯을 깔고 고기를 주문했지만 무슨 술을 마실지 결정하지 못해 술은 좀 있다 주문하겠다며 서버를 돌려보내고는 술 생각을 끊고 타임라인을 새로고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행 중 누군가가 새로 광고하는 맥주2)가 있는데 전에 먹어보니 괜찮았다고 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주문해보기로 하고 여러 병을 주문했습니다. 잠시 후 처음 보는 녹색 병이 깔렸고 그 중 일부를 따서 유리컵에 따랐습니다. 불판 가까이 뒤집혀 놓여 있던 유리컵은 커피머신 위에 올려놓은 에스프레소컵마냥 따뜻했습니다. 맥주를 따라 한 모금 마셨는데 이건 영락없이 한국 맥주 그대로였습니다. 어느 봄날 저녁 판교 돼지고깃집에서 튀는 기름과 피어오르는 뿌연 연기 사이에 앉아있던 저는 코로 숨을 한번 들이쉬자마자 끈적이는 쉰냄새로 가득한 천막 아래 평상으로 날아가버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런걸 만들어 파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더 마실 수가 없었고 이정도면 굳이 자전거를 회사에 두고 퇴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시 판교로 돌아와보니 일행들이 이미 남은 술을 서버에게 반납하고 있었고 저도 제 테이블에 있던 술을 반납했습니다. 불판 가까이 있던 술병은 원적외선 치료기마냥 뜨끈했습니다.

분당

저녁때 실은 어제부터 땡기던 치즈에 잘 버무려진 짭짤한 감자튀김을 먹고싶어서 집 근처에 있는 패밀리레스토랑에 갔습니다. 감자튀김을 주문하면서 맥주라도 마실까 하고 메뉴판을 보니 카스 생맥주가 있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순간 판교 주변의 상가에서 익히 봐 온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갑니다. 판교에 널린 멋진 유리건물의 저층부에는 상가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상가들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복도에는 가게에서 쓸 물건이 쌓여있기도 한데 종종 그 사이에는 내용물이 들어있는 술병이 놓여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평소에는 그렇게 아무데나 쌓아놨다가 판매 당일에 냉장고에 넣어 차게 만든 다음 서빙하는 모양입니다. 또 그 술병들이 주문되어 불판 옆에 놓였다가 다시 냉장고로 들어오기를 반복하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하지만 이 패밀리레스토랑은 이벤트 메뉴의 객단가를 6만원으로 잡고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지경은 아닐 거라고 믿고 가장 싼 카스 생맥주를 시켜봅니다. 만약에 실패해도 다른 맥주 가격의 57%니까 돈 버렸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여느 술집과 다르지 않게 안주삼을 감자튀김이 나오기 한참 전에 맥주가 먼저 나왔고 소파 사이에서 페브리즈 냄새를 가득 품은 토사물 찌꺼기가 나와도 놀라지 않겠다는 각오로 한모금 마셨는데.. 어. 괜찮습니다. 파이프 안에 몇날며칠 늘러붙은 썩은 맥주찌꺼기 냄새 없이 그냥 멀쩡한 맥주입니다. 돈을 허공에 날려버릴 위기에서 금새 현실로 돌아와 잔을 거의 비울때쯤 감자튀김이 나왔고 바로 같은 맥주를 더 시켰습니다. 주문한 음식 메뉴만으로는 목표 객단가를 채우지 못했겠지만 술값으로 객단가를 상회했으니 패밀리레스토랑 입장에서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었을 겁니다. 평소에는 쉬어터진 냄새를 풍기는 카스 맥주였는데 여기서는 아니었습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괜찮았습니다.

교훈

맥주 제조사들이 블라인드 테스트3)도 해가며 자신들이 그렇게까지 쓰레기를 만들지는 않는다고 어필하지만 이들의 주장과 우리 손에 들린 이 쓰레기 사이에 어째서 이런 거대한 차이가 생기는 것일지 고민했었습니다. 사실 이유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지난 겨울에 만원에 네 캔 짜리 편의점 맥주가 어째서 그렇게 놀랍도록 맛있었는지, 여름이 다가올수록 뙤약볕이 내리쬐는 가게 앞에 생맥주통을 쌓아놓고 장사하던 그 닭집 맥주가 어째서 그렇게 놀랍도록 쉬어터졌는지 말입니다. 우유는 냉장유통이 상식이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맥주는 그게 상식이 아닙니다. 여느 고깃집이 그렇게 하듯 상온에 방치했다가 냉장고에 잠깐 넣어 차게 만들어 내놓는 맥주가 멀쩡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이쯤 되면 맥주회사는 자신들이 멀쩡한 물건을 만들어 판다고 블라인드 테스트 기사를 내놓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게 냉장유통을 해야 하는 물건이라고 판매점에 광고를 해야 할 지경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실 맥주 보관 문제를 피할 적당한 방법은 있습니다. 맥주 공장이 있는 도시에 간다면 그 회사의 맥주를 사 마십니다. 생맥주를 마셔야 한다면 비교적 깔끔한 가게에 가거나 표준 매뉴얼을 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프랜차이즈 가게에 갑니다. 그런 곳이라면 최소한 맥주통을 뙤약볕에 방치하거나 몇날며칠 기기 청소 없이 판매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적을 테니까요. 오늘 맥주를 시켜 마신 그 가게에는 다시 가서 또 적당히 맛있는 짭짤한 감자튀김에 그 생맥주를 시켜 마실 겁니다. 그 가게의 맥주는 아마도 오비맥주에서 생산에 관여한 사람들이 의도한 맛과 그리 멀지 않을 겁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며 고객들을 바보로 만드는 마케팅 대신 멀쩡한 시설과 프로시저에 따라 술을 파는 가게를 조사해 리스트를 공유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인데 요즘은 흐지부지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blog/problems-with-keeping-beer.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04-14 22:09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