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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remote-day-1

원격근무 1일차

결론: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날벼락

사실 엊그제만 해도 우리 같은 환경에 원격근무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쓴 날 저녁에 회사로부터 바로 원격근무를 시작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다른 원격근무 사례들을 보니 우리보다 규모가 작고 기술수준이 높은 팀에서 미리 개발문화를 조율한 다음 서서히 시작해서 안착하는 모양이었습니다만 우리는 그보다는 훨씬 급하게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호흡과도 비슷합니다. 지난번 양산형 게임 개발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뭐든 엄청 빨리 진행하는 우리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망분리된 개발환경을 VPN을 통해 인터넷에 노출시키는 회사 입장에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결정을 했고 엄청 급하게 작성된 것이 분명한 근무지침이 인터넷을 통해 처음 접근해보는 회사 메일 환경을 통해 날아왔습니다. 그렇게 첫 날이 시작됐습니다.

준비

사실은 그렇게까지 날벼락은 아니었고요, 하루정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개발 문화 측면이나 협업이 잘 될 것인지를 고민하기에 앞서 일단 회사와 집은 환경이 많이 달랐습니다. 집에서도 데스크탑 PC를 사용해 게임도 하고 글도 쓰고 코딩도 하곤 했지만 회사만큼 많은 모니터와 더 강력한 기계가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집에서는 기계가 충분히 강력하지 않아 생기는 몇몇 상황에 좀더 관대하게 행동하곤 했습니다. 아무리 원격에서 RDP1)를 통해 일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모니터는 더 여러 개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모니터를 구입하기도 그렇고 또 당장 강력한 기계를 장만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쓰던 기계로 어떻게든 비벼야 했습니다. 일단 모니터 개수는 포기했습니다. 또 원격에서 디바이스 테스트도 포기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개발 상황이 타겟 디바이스를 밀접하게 테스트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책상위에 굴러다니던 태블릿을 회사처럼 모니터 위에 올려보기로 했습니다. 하나는 서피스고, 하나는 아이패드로 전자는 독립된 윈도우 기계니까 컴퓨터 한 대와 추가모니터 한 대 역할은 해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아이패드 미니는 좀 낡았지만 최소한 카메라와 마이크, 큰 시계 역할을 충분히 해낼 거라고 예상했고요. 재빨리 태블릿을 공중에 고정시킬 수 있는 거치대 두 개를 주문했고 다행히도 이들은 다음날 업무시작시각 직후에 도착했습니다. 거치대를 판매하는 분도, 이를 배송해주신 모든 분들도 분명 매일을 우리들같은 호흡으로 일하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모니터 위에 윈도우 머신을 공중에 띄울 작정이므로 이들을 부드럽게 조작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공간이 좁은데 별도 키보드와 마우스를 놓고 조작하긴 좀 그랬거든요. 그래서 Synergy를 구입해서 설치했습니다. 이제 서로 다른 윈도우 기계 두 대 사이에 키보드와 마우스 한 세트만 가지고 조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 이럴 때를 대비한 것은 아니지만 회사와 집에 같은 키보드, 마우스가 합쳐서 3세트 있었습니다. 예상한 대로 이 똑같은 입력장치들은 낯선 작업환경을 효과적으로 익숙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시작

회사의 놀랄만큼 파격적인 지원 덕분에 RDP롤 통해서 모니터가 하나로 줄어든 내 작업환경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의사소통도구, 형상관리도구, 언리얼에디터, 위키, 커맨드라인, 인하우스툴 등등. 언리얼에디터를 처음 실행해서 모니터 하나에 빼곡하게 들어찬 인터페이스를 보고 잠깐 굳었지만 레이아웃을 이리저리 조절해 어떻게든 한 화면에 다 들어오도록 한 다음 코딱지만한 뷰포트에 익숙해졌습니다. 나머지 도구들은 딱히 익숙해질 것도 없었습니다. 가끔 화면이 뭉개지거나 응답이 잠깐 늦는 정도는 집에서 단련한 관대함 앞에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피드백

일단 오늘 제 목표는 평소보다 피드백 텐션을 훨씬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팀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사람 중 하나였고 다들 채팅보다는 직접 말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말에 익숙하다기보다는 말의 속도에 익숙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글로 그만큼 빨리 피드백하면 답답함이 덜할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평소보다 더 많이 채팅창에 나타났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빨리 반응했습니다. 댓가로 각오한 만큼 답답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제 시간을 써야 하는 업무를 진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저는 말하는데 에너지를 써야 하는 타입의 사람이고 엄청나게 떠들어대고 나면 에너지를 몽땅 소모하고 늘어져있기 십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일하니 텐션을 올려서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피드백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에너지가 많이 남았습니다.

긍정적인 면

당연히 출퇴근시간이 사라졌고 저는 평소보다 두시간 늦게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만 자다 일어난 그대로 앉기는 좀 그래서 밖에 나갈 것처럼 준비한 다음 자리에 앉았습니다. 옷은 편하게 입고있었지만요.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 출근복장 자체가 몹시 편한 모습이긴 합니다. 출퇴근시간이 사라지고 또 식사하러 이동하는 시간도 사라졌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열차를 기다리고 걷고 구내식당 줄을 서는 등등등의 모든 시간이 사라졌고 이 시간에 좀 일하고 좀 더 쉴 수 있었습니다. 텐션을 올려 대응한 덕분에 함께 일하는 스탭들의 업무속도도 이전에 비해 느리지 않았습니다. 또 업무시간 중 집중 감소로 비롯되는 신뢰 문제가 일어날 조짐을 '아직까지는'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호흡은 만만하게 일했다가는 순식간에 문제가 일어날만한 속도라 함부로 신뢰를 깰 결정을 하기는 아주 어려울 겁니다.

부정적인 면

일단 첫 날에 한정한다면 높은 텐션으로 피드백했기 때문에 집중해야 하는 일을 전혀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집중하려고 마음먹으면 집중하기는 좋은 환경입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일할 때 가끔 듣는 음악을 스피커로 틀어놓 있습니다. 채팅창은 태스크바로 내려놓으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아직까지는 집에서 회사 일에 집중하는 것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일단 제 일을 해내려면 어쨌든 집중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니 둘째날은 어떻게든 개선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또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완전히 동기화된 상태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가령 이력서를 검토할 때 필요한 사람들이 가까이 앉아 각자 자기 모니터에 문서를 띄워놓고 바로 말로 의사소통하고 말이 끝나면 바로 결정을 내릴만한 상황에서 약간의 시간차이로 검토와 결정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각자의 시간을 동기화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생각하면 더 많은 비용을 사용한 것은 아닐 겁니다.

다음에 계속

남들은 이미 몇 년 씩이나 해와 당연할지도 모르는 원격근무를 이제서야 처음 해보고 경험이 재미있어서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모습이 좀 황당해 보일 수 있습니다만 일단 오늘은 각오한 것 보다는 괜찮았습니다. 내일은 처음으로 '회의'도 해야하고 또 집중해서 문서를 만들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정해진 원격 기간은 아직 더 남아있으니 이 동안에 최대한 우리 같은 상황에서 원격근무에 어떤 양상이 일어나는지 배워 둘 작정입니다. :)

blog/remote-day-1.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0-03-11 21:33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