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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remote-day-3

원격근무 3일차

채널 기능이 있는 메신저를 사용하면서도 일대일 대화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채널로 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시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원격이 시작되자 아예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전에는 순차로 진행하던 의사소통이 서로 다른 채널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고 말을 안해서 아낀 에너지를 더 많은 의사소통을 하면서 비슷하게 소모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에도 원격근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단 처음에 예정된 원격근무 기간은 이번주까지이고 다행히도 확진자 증가 추세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다음 주에는 그리운[?!] 스텝들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도 해봅니다. 원격근무 이야기를 하자니 이제 겨우 원격근무 3일차입니다만 그래도 오늘 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DM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오래 전부터 일대일 메신저로 일해오던 습관이 뼛속 깊이 남아있어 현대의 슬랙 같은 도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다른 하나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장소에서 채팅하기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 여러 사람들이 같은 주제를 동시에 이야기하도록 고안된 메시징 도구를 사용하면서도 꽤 많은 사람들은 굳이 각자의 이름을 선택한 다음 일대일 대화를 하길 고집하는 원인을 생각해본 결과입니다. 동시에 여러 사람들이 이 대화를 보면 더 좋을텐데 굳이 일대일로 이야기한 다음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기를 원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이전까지는 제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항상 채널에서, 누군가가 제게 이야기를 걸어올 때는 항상 DM으로 하곤 했습니다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습니다.

여느 날과 같이 아침부터 사람들이 제게 DM을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만 상대가 주제를 꺼내기 직전에, 혹은 직후에 채널로 옮겨서 이야기하자고 한 다음 채널로 옮겼습니다. 이미 팀이나 주제 별로 이야기할 적당한 채널이 있었어요. 하지만 채널에는 파리가 날리고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는지 마는지 알 수도 없는 DM으로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잠깐 뜸을 들였지만 여섯 명에게 차례차례 한숨을 참으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이 채팅 도구는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이야기할 때 생산성이 개선되는 도구이고 사람들이 보는데서 이야기하면 이야기에 다른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고 또 간단한 내용이라면 이야기를 따로 정리하지 않고서도 꽤 널리 공유되기도 한다고요. 그렇게 이야기 여러 건을 채널로 옮겼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DM을 걸어 왔습니다.

사람들의 습관을 빠른 시간 내에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원격 기간이 끝나고 나면 채팅 대신 자리로 찾아와서 줄을 서서 기다리겠죠. 하지만 적어도 원격을 진행하는 기간에는 오래된 습관 때문에 이야기를 공유하기 어렵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팀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곤란한' 습관을 줄이려고 노력할 작정입니다.

가시성

다들 자리에 앉아있을 때는 일을 하고는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그냥 쓱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둘러보다가 집중이 깨진 것 같은 사람이 있으면 슥 다가가서 이야기하고 있으면 힌트를 더 얻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이런 행동만으로는 실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기는 또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격을 시작하면서 서로가 눈에 띄지 않기 시작하자 가시성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작업 가시성 이외에도 그냥 그 사람이 일을 진행하고는 있는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서 자리에 있기는 한지 알 방법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자리에 있는지 알고싶다면 채팅을 시작해보면 될 겁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우리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는 메신저와 위키와 메일과 형상관리도구 등 각자의 작업 가시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도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격을 시작하자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가시 영역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사용 가능한 작업 가시화 도구에 나타나지 않으면 이 사람이 자고 있는지 일은 진행되고 있는지 아니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채팅에도 나타나지 않고 위키와 메일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형상관리도구의 커밋메시지에도 뜸하면 좀 답답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살아는 있는지 크래시리포트 페이지를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전 같으면 이 정도 상황이면 자리로 찾아가 상황을 확인하려고 했겠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상당수 사람들이 팀에서 사라져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딱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분들을 제거 제어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요.

동시진행

종종 사람들이 제가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이야기할 때 수다스럽고 사람들과 온갖 주제로 이야기하는데다가 일 이야기가 시작되면 0.5 존카맥 정도 속도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말하는 시간은 짧지만 내가 말하는 글자 수가 더 많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할 때마다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내가 키맨이 아닌 회의에 들어가지도 않고 담배터에 잘 올라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집중해서 일합니다. 하지만 말할 일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리로 찾아오고 심하면 서너명이 계속해서 줄을 서서 이야기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 좋은 점은 앞에서부터 한 명씩 주제를 듣고 협의를 진행하다 보면 뒤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듣다가 '아!' 하고 자리로 돌아가버리기도 하고 또 자연스럽게 주변에 강한 민폐를 끼치면서도 여러 가지 주제의 진행상황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면서도 저는 한번에 한 사람과 이야기하며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채팅으로 전환하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여러 채널에서 동시에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여러 채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젊은 시절의 긴 시간을 IRC에서 동시에 여러 채널을 열어놓고 마치 내가 여덟 명은 된 것처럼 여러 채널에서 거의 동시에 이야기하던 과거를 살려 온갖 질문에 답하고 온갖 협의를 하고 파일 위치를 전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비슷한 볼륨의 일을 하면서 말을 덜 해서 에너지를 덜 소모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 같으면 차례대로 일어났을 법한 일들이 이제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거의 동시에 상대해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저녁때가 다가오면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아무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곤 했는데 그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또 비슷한 정도로 에너지를 소모했습니다. 업무일지로 미루어 대화하며 일할 때보다 의사소통을 더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만 말을 거의 안 했음에도 에너지 소모는 비슷했습니다. 긍정적인 면이라면 같은 에너지로 일을 더 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부정적인 면을 생각해보면 말을 안해도 똑같이 혹은 더 피곤했습니다.

이어서 계속

생각해볼만한 주제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원격근무를 계속하는 동안에는 이전까지 그저 마구 해 왔던 일을 약간 다른 시각으로 볼 기회가 됩니다. 또 이전에 별 생각 없이 하던 일의 습관이나 스타일을 다른 각도로 접근해볼 수도 있고요. 이번 주 내내 원격을 진행할텐데 그 동안 생각해볼 주제가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기록을 남겨 둘 작정입니다. 그러면 또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

blog/remote-day-3.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0-03-11 21:33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