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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읽은 책 정리

지난 1월에 이어 2월에 읽은 책을 정리해 둡니다.

평균의 종말

평균의 종말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평균의 발전과정을 접하며 현대 기준으로는 어처구니없는 통계 방식을 통한 연구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기준으로 이제 저 같은 그냥 사람도 사건의 집합을 구성하는 숫자들을 평균낸 다음 이 평균을 가지고 연구한다는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이해하게 됐습니다만 거기까지 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평균 치수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맞지 않는 조종석의 사례에서 시작해 평균이 현대 사회에 얼마나 많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다룹니다. 물론 테일러주의가 이룩한 성과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공정 표준화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근간을 이뤘고 이제 그 부작용을 본격적으로 생각해볼 때가 됐습니다. 다만 표준화된 교육 분야의 강한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할때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할 때 갑자기 내용이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분명 맨 앞에서 꿈꾸는 역할을 맡아야 할텐데 그걸 바로 보기 힘들어하는 자신이 이미 테일러주의에 찌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맙소사 마흔

맙소사 마흔은 제목이 재미있어서 사봤습니다. 또 제목 자체가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다가올 사건이기도 하고요. 글쓴이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마흔이라는 나이에 이미를 부여하고 그 이전과 이후의 경험을 재미있게 나열하고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따뜻하게 고민한 내용입니다. 여느 자기계발서 처럼 나를 사납게 몰아세우지도 않고 또 과도하게 감싸려 부자연스럽게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뒷부분에서 개인적인 관심사로 빠지면서 제목과 내용의 거리가 약간 멀어지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살짝 마음에 안 들기도 했지만 나이들어가면서 나에게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글쓴이의 경험을 지켜보며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수축사회

수축사회는 책 소개를 보며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을 일으키는 일관된 원인이 있을 것이고 이를 이해할 때 현재를 이해하고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는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현상이 결국은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이고 의사결정을 할 때 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관점과 한국전쟁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정책을 만들어낸 가정이 이미 현대에 이르기 오래 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현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이 가정과 정책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는 관점이 흥미로웠고 또 납득했습니다. 역시 평균의 종말과 마찬가지로 뒷부분에서 갑자기 저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만 누군가는 맨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마무리했습니다.

아르센 뤼팽 전집 - 황금삼각형

황금 삼각형은 여전히 전체를 다 읽기에는 머나먼 아르센 뤼팽 전집의 절반 정도에 해당합니다. 1월에 읽은 포탄 파편과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에 다른 인물이 겪은 사건에 아르센 뤼팽이 등장하는 형식입니다. 이 소설이 씌여진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으면 불편한 지점이 많이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인종이나 성별을 배척하는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고 나타나거나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적 시각이 우호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은 제3세계 사람 입장에서 읽기에 편안하지는 않았습니다. 읽기 전에 이런 맥락을 조금 더 생각해뒀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이 시대의 세계사를 알아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1월처럼요. 홈즈와는 달리 비 시각적인 요소가 사건을 푸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 여러 모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만 시메옹을 눈앞에 놓고서도 이야기의 결말에 가서 나타나는 의심을 시도하지 않았은 자신에게 실망스러웠습니다.

· 2019-03-10 19:12

문서를 작성하는 이상한 습관들

제 직업은 누군가를 문서로 설득해서 내 생각대로 움직히도록 하는 일입니다. 문서 이전에 직접 얼굴을 맞대고 진행하는 협의 과정이나 문서 이후의 개발진행에 따른 지원 역시 일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업무의 핵심은 목표와 세부사항을 나타낸 문서입니다. 문서를 작성하면 간접적인 피드백을 받게 됩니다. 가령 계획한 기능을 기간 내에 개발하고 유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이번 문서작업은 성공적이라고 간접적으로나마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더 많고요. 다른 분들이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을 돕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문서를 조금 더 오래 써 보면서 문서로부터 풍기는 이상한 냄새를 좀더 잘 발견할 수 있어 다른 분들의 문서에도 코를 갖다대보는 정도의 역할입니다. 몇 가지 자주 마주치는 이상한 습관을 나열해보려고 합니다.

안전한 보관을 거부

디지털 문서는 물리적으로 아주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습니다. 내 컴퓨터에 달린 스토리지 기기는 미세한 입자들의 전기적 상태에 따라 저장됩니다. 물리적 충격, 전기적 자극, 자력, 장기간 방치에 따른 전력 감소 등 디지털 문서를 사라지게 만들 원인은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소프트웨어는 어떨까요. 하드웨어의 펌웨어, 운영체제, 그 위에서 돌아가는 수많은 드라이버, 문서를 작성한 소프트웨어 등 중간에 어느 것 하나만 오동작해도 디지털 문서를 열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당연하게 문서를 열고 수정하고 저장하는 과정은 사실 수많은 사람들의 작업물이 거의 기적적으로 문제 없이 돌아간 결과입니다. 그래서 문서를 작성할 때 그 문서가 내 컴퓨터에만 저장되어있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개인 환경에서 작성하는 문서라면 반드시 클라우드 서비스에 실시간으로 업로드하는 환경 - 드랍박스나 원드라이브 같은 - 에서 작업해야 하고 기업 환경에서 작성한다면 짧은 주기로 형상관리도구 - svn이나 퍼포스 같은 - 에 올려야 합니다.

문서를 짧은 주기로 형상관리도구에 올리라는 가이드는 쉽게 저항에 부딪치는데 가장 자주 접하는 이유는 '완성되면 올리겠다', '이 수정이 완료되면 올리겠다' 같은 것들입니다. 그냥 중간상태를 올려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암만 이야기해도 이 이상한 습관을 고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중간상태가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는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는데 어째서 그런 경향을 가지게 됐는지 쉽게 원인을 떠올리기 어려웠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형상관리도구에서 로컬 커밋과 리모트 커밋을 구분해 - git 처럼 - 중간상태가 다른 사람들에게 덜 노출되도록 하거나 아예 작업과정이 실시간으로 동기화되는 클라우드 기반의 문서 작성 도구를 사용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비 자발적 협업 방해

같은 문서를 여러 사람이 쓸 일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해서 진행할 가능성이 없고 또 이 팀이나 이 회사에 영원히 남아있으리라 예상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쓰는 문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수정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내 문서는 문서를 읽는 대상에게 목표를 잘 설명하고 또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내 문서를 수정할 나를 포함한 미래의 누군가에게도 목표를 잘 설명하고 또 새로운 요구사항을 문서에 쉽게 추가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합니다. 잘못된 문서 구조 - 가령 잘못된 챕터 구분이나 논리적으로 잘못 나뉜 개념 등 - 는 이후 문서에 새로운 요구사항을 반영하기 어렵게 만들고 문서 전체를 재작성하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이 내 문서를 잘 수정할 수 있도록 문서를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구조를 수정하기 쉽게 만들도록 가이드하는데 가장 자주 부딪치는 저항은 어처구니없게도 다른 사람의 문서를 수정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작성한 문서는 그 모든 권리가 작성자에게 있는 것 마냥 내가 수정해서는 안되는 무슨 신성한 물것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작성한 문서라면 그 모든 권리는 회사가 가지고 있고 회사의 업무를 위임받은 내가 수정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내 문서를 수정하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야 하고요. 내 문서는 나를 반영하는 거울 같은 것이 아니라 회사의 자산이고 회사의 자산은 회사의 업무를 위임받은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수정하고 활용해야 하는 물건일 뿐입니다.

나쁜 표 사용

적절한 표는 복잡한 설명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표를 사용할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분하는 훈련은 문서를 몇 년 동안 작성한 분들에게도 잘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실은 거의 대부분이 표를 사용할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잘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글로 설명하다가 뭔가 설명을 반복할 상황이 생기면 더 고민하지 않고 바로 표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표는 문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또 문서를 수정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복잡한 표를 잘 만들 수 있다는 어떤 문서작성도구로 작성한 표 사례의 대부분은 표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제시되는 사례 대부분은 동사무소나 은행에 있는 어처구니없이 복잡한 신청서입니다. 이런 문서는 실상 습관적으로 표를 이용해서 만들어온 것 이외에 표를 사용할 이유가 없고 이런걸 잘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문서에 이런 표를 사용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표는 필요한 곳에만 제한해서 사용해야 하고 표가 복잡해져 지금 쓰는 문서작성도구의 기능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교체해야 하는 건 문서작성도구가 아니라 그 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고의 흐름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복잡한 표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일단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지 경계해야 합니다.

도구의 자동화 기능을 무시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직업의 일부라면 여기에 사용하는 도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가령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 이하 워드 - 를 사용한다면 워드에는 글자를 입력하는 기능과 폰트 종류, 크기를 조정하고 표와 그림을 삽입하는 것 이외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알아둬야 합니다. 가이드할 문서를 보면서 자주 마주치는 상황은 스타일 기능 대신 챕터 제목을 폰트 크기를 조정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번호를 수동으로 매긴다든지 들여쓰기를 스페이스로 한다든지 페이지나눔을 엔터로 하기도 합니다. 이 현상의 공통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들을 자동으로 해주는 기능이 있으리라 상상하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이들을 자동으로 해주는 기능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서는 크게 두 가지 구성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는 시각적인 구성입니다. 문서는 화면으로 보거나 인쇄해서 볼텐데 이 때 문서의 여러 부분은 나머지와 시각적으로 구분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령 제목과 본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목록은 번호나 기호로 시작해야 하고 또 상황에 맞게 들여쓰여있거나 내어쓰여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적 구성입니다. 문서는 시각적인 부분을 제외하고서도 나머지 부분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목은 폰트 크기가 동일하더라도 이 부분이 제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하고 목록은 기호나 번호를 없애고서도 이 부분이 목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시각적인 요소를 자동으로 입력해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제목을 폰트 크기를 바꾸는 대신 스타일을 통해 입력해야 하는 이유는 이게 더 편하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쉽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제목 부분에 제목이라고 표시해 기계가 이를 참고해 목차를 자동으로 만들 수 있게 해주고 또 문서를 스크린이 더 좁은 모바일 기계에 표시할 때 제목과 본문을 자동으로 구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동 목록도 마찬가지이고 자동 들여쓰기나 페이지나눔에 엔터 대신 페이지나눔 문자를 입력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

문서 작성을 가이드하며 느낀 이상한 점들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또 그 이상한 점을 고치기 위한 가이드와 그에 따른 저항 사례도 많고요. 일부는 수정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결국 수정에 실패해 이전의 '이상한 습관'을 유지한 채 이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더 복잡하고 더 귀찮은 규칙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문서작성 습관 자체를 수정하는데는 저항하다가도 이상하고 귀찮은 규칙 - 가령 문서를 수정할 때마다 문서 내부에 수정일자와 수정사항의 요약을 기입한다 - 은 쉽게 수긍하곤 합니다. 앞으로도 문서 작성에 이상한 습관을 고치는 방향으로 가이드하겠지만 여전히 이 이상한 습관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는 의문으로 남을 전망입니다.

스크린이 두 개 있는 기계

삼성전자에서 갤럭시 폴드1)를 발표하면서 펼치면 조그만 태블릿 크기가 되지만 접으면 적당한 크기의 폰으로 변하는 기계에 다들 급 관심을 가지는 모양입니다. 회사에서 엘리베이터에 타거나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가면 온통 접는 폰 이야기 뿐이었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엘지 V50의 액세서리는 갤럭시에 비하면 여러 모로 초라한 느낌이기도 하고 최신 유행에 동참하는데 실패한 모습으로도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제품을 비웃는 듯한 이야기를 가끔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기준에서 이 듀얼 스크린 액세서리는 꽤 매력적이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을 넘어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기계가 빨리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스크린이 두 개 달린 기계가 꽤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십 수년 전 아이리버에서 컨셉을 발표했던 전자책 단말기 때문입니다. 기억 속에서는 훨씬 깔끔한 두 쪽 짜리 기계였는데 막상 시간이 흐른 뒤에 구글에서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그와는 다른 좀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리버의 북투 컨셉은 실제 책과 같이 이잉크 디스플레이 두 개를 탑재한 장치입니다. 물론 실제 책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 사용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책을 열어놓고 참고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고 한쪽은 책, 다른 한쪽은 메모 같은 다른 앱을 띄울 여지도 충분했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총알을 장전한 채 기다렸지만 영영 제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컨셉 디바이스 이름을 딴 전자책 서비스를 열었던 모양인데 이 사실을 10년도 더 지나서 알게된걸 보면 별로 잘 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스크린이 두 개 달린 기계가 생각보다 훌륭할 거란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패드가 처음으로 출시될 즈음2)에 공개된 쿠리어 컨셉3)은 터치스크린 두 개를 단 기계를 사용할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이전에 하던 생각과 비슷하게 양쪽 페이지에 서로 다른 앱을 실행하고 한 가지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여러 앱을 거치며 작업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이리버 제품 때만큼 빨리 총알을 장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시대와는 달리 이런 전자제품들의 가격이 한참 올라가는 중이었고 분명 어지간한 비싼 랩탑 가격에 맞먹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나오기만 한다면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는 짤막한 기사4)끝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이때쯤 첫번째 아이패드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아이패드 몇 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이패드 미니 3 하나를 책 읽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주력 태블릿은 마이크로소프트 서피스 프로 4입니다. 서피스 프로 3에서 정립된 생김새는 몇 년이 지나고 그 사이 메이저 업데이트를 몇 번 거치면서도 거의 변하지 않아 몇 년 지난 제품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지만 새로 나온 제품과 언듯 봐서는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원노트 필기를 훌륭하게 지원하고 꽤 괜찮은 i5 기반 윈도우 기계인데다가 키보드도 훌륭해서 지금까지 사용해온 어지간한 포터블 기계 중 가장 좋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페이지 두 개를 동시에 보고싶거나 페이지를 보며 필기하고 싶었습니다. 스크린을 반으로 나눠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답답했습니다.

이때마다 똑같은 서피스를 하나 더 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서피스 두대를 각각 세로방향으로 돌려 가로로 늘어놓은 다음 양쪽에 서로 다른 앱을 띄워 쓰는 겁니다. 한쪽에 웹브라우저, 다른 한쪽에 원노트를 띄워 놓는 식으로요. 구형 서피스 가격이 생각보다 빨리 낮아졌기 때문에 이 계획을 거의 실행할 뻔 했습니다만 몇가지 문제에 부딪쳤습니다.몇몇 소프트웨어는 당연히 컴퓨터 한 대당 라이센스를 판매했으므로 같은 소프트웨어 두 개가 필요했습니다. 윈도우 라이센스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이쪽은 하드웨어에 라이센스가 딸려오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됐지만 같은 소프트웨어를 두번 구입하는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또 한쪽에서 복사한 글이나 이미지를 다른 한쪽 서피스로 아름답게 전달할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 사실 비슷한 실험을 해봤는데 한쪽에서 이미지를 붙여넣고 인터넷으로 동기화되길 기다린 다음 다른 쪽에서 사용하는건 아름답지도 생산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동기화가 조금만 지연되면 상황은 아주 구질구질해졌습니다. 기계 두 대를 들고다니는 불편함이나 어댑터 두 대로 배터리를 각각 충전해야 하며 업데이트도 두번 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거의 포기하고 살다가 엘지전자에서 폰 두 개를 접어 들고다닐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액세서리를 발표한 겁니다. 이럴수가! 아이리버 북투를 처음 보고 나서 십 수년만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총알을 끌어모으려는 의지력이 머나먼 과거로부터 시간을 건너 내 머릿속으로 빨려들어오는 기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엘지전자는 스마트폰의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서비스도 제대로 할 줄 모르지만 이 액세서리는 꽤 괜찮은 제품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습니다. 갤럭시노트 두 대를 끼워 다닐 액세서리를 만들 수도 있고 아이패드 프로 두 대를 끼워 다닐 액세서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유선 접점을 사용하면 구질구질하게 인터넷 동기화를 거치지 않아도 아름답게 기계 두 대 사이에 텍스트와 이미지를 주고받을 수 있을테고 또 양쪽에 동시에 필기메모를 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다른 한쪽 기계로 여전히 작업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완전히 아름다운 가능성을 가진 제품입니다. 그 액세서리에 꽂을 기계가 엘지전자 제품만 아니라면요.

후.. 저도 압니다. 이런 제품을 구입할만한 사람이 거의 없고 덕분에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해 조용히 시장에 나오지도 못한 채 사라지리라는걸요. 하지만 여전히 저는 스크린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기계가 언젠가 하나쯤은 제대로 나와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니 고대하고 있습니다. :)

· 2019-03-02 21:45

시대에 따른 게임의 의미 변화

현대에 게임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5)을 하다가 문득.

'게임이란 무엇인가' 같은 심오한 철학적 주제를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처음 나타난 이래 긴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모습을 한 게임이 나타나 왔고 이걸 전통적인 관점의 게임 범주에 넣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봐 왔습니다. 제 관점은 새로운 모습을 한 게임이나 이전에는 게임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물건과 이전에도 게임이라고 불렀던 물건 사이에 차이점이 줄어들고 있다면 이들 모두를 게임이라고 부르거나 양쪽 모두 게임이라고 부르지 않아여 한다는 것입니다. 속성이 비슷한 두 가지 물건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건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어느 한쪽을 게임이라고 부른다면 나머지도 게임으로 부를 수 있다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다소 삐뚤어져 보일 수 있는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도 게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한참 시장에 정신없이 굴러나오던 양산형 MMO 게임 중 하나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습을 돌이켜보면 김밥집이 돈을 조금 벌자 다같이 김밥집을 열고 노래방이 돈을 조금 벌자 다같이 노래방을 열던 그런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MMO 게임을 완성하는건 결코 쉽지 않고 온갖 괴상한 일이 일어나는 별로 시도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피할 수 있으면 적극적으로 피하고 싶은 일이 MMO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많은 회사들이 노래방을 창업하듯 MMO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중국 게임이 직접 국내에 서비스되기 이전 시대라 중국 게임의 존재와 그들의 특징은 글이나 영상을 통해 전해지곤 했는데 당시 국내 MMO 게임엔 일종의 터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령 자동이동이나 자동사냥을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자동이동이 기본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안하고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알아서 목적지까지 이동하고 이를 퀘스트 시스템과 결합해 원터치로 퀘스트가 척척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며 저걸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고민하곤 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십 수년이 흐른 지금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정답은 이런 모습을 한 물건도 게임이고 이걸 실행하고 있는 행동을 게임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네. 게임 맞습니다.

각각의 고객들은 시장을 만들고 시장의 움직임에는 고객들 각각의 요구사항이 녹아있습니다. 십수년 전 우리들은 우리가 만들던 그 게임들에 시야를 약간 좁힌 채로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객들은 왜 우리 게임을 기대하고 플레이하려 할까. 고객들이 우리 게임을 플레이하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어떤 부분에 고통스러워할까. 만약 고객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부분이 명확하지만 그것이 우리들이 당시 가지고 있던 터부와 충돌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또 우리 고객들이 게임으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가치를 게인 밖에서 찾아냈다면 우리는 이를 수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게임 밖으로부터 오는 가치를 그대로 놔둘 것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 역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는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고객들의 고통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고객들이 이동에 어려움을 느끼고 이 이동 동작이 게임의 핵심 동작이 아니라면 자동으로 바꾸거나 나아가서는 없애버리고도 나머지 게임이 성립해야 합니다. 고객들이 서로 아이템을 교환하고 싶어한다면 교환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물론 이 경우는 이 교환이 게임 시스템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는 똑똑하고 단순한 디자인이 필요하겠지요. 또 고객들이 게임 밖에서 아이템을 교환하며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면 개발사는 당연히 이를 게임 내부로 끌어들여 직접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객들의 요구사항을 더 잘 흡수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변화의 결과가 50년 전에 시작되어 현대에 이른 전통적인 게임의 모습과 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다못해 게임에 등장하는 자연물을 표현하는 방법만 해도 지난 수십년 사이에 드라마틱하게 변해왔는데6) 게임 시스템이나 장르, 겉모습, 플레이하는 목적이 변하지 않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게임의 많은 것들이 변한 나머지 그 모습이 이전에 우리가 이해하던, 또 일부 고객들이 이해하던 게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도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게임의 한 모습입니다. 물론 이 모습 역시 앞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뀔 테고 상업용 게임을 만드는 저 역시 게임의 모습과 의미가 바뀔 때마다 머릿속의 정의를 계속해서 바꿔 나갈 작정입니다.

· 2019-02-24 18:01

가계부 항목 변경

후잉에 가계부를 씁니다. 맨 처음 기록을 시작할 때는 거래가 일어날 때 꼬박꼬박 항목을 기입하는데 모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덕분에 기록 체계에 대해서 아무 고민도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거래를 기록하는 일 자체에 익숙해지고 나니 거래를 어떤 방식으로 기록해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거래를 어떤 관점으로 볼지 서로 다른 법이고 후잉의 가계부 시스템은 이 다른 관점을 잘 반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유흥 계정 종료

얼마전에는 처음 가계부를 쓰기 시작할 때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던 '유흥' 계정을 없앴습니다. 유흥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오락이나 놀이 같은 의미가 있다고 되어있는데 한국에서 유흥 하면 어째 알콜이 포함된 여러 가지 행동이라는 뉘앙스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자연스럽게 유흥 계정에는 술값을 기입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술을 마시는 모임이 줄어들었습니다. 다같이 나이가 들다 보니 술을 파는 가게에서 다같이 모여 술을 마시기보다는 각자 마시고 싶은 술을 사다가 집에서 마셨습니다. 집에서 술을 마셔도 편의점은 가깝고 원하는 메뉴는 쉽게 배달됐습니다. 또 술을 마시다가 바로바로 자리에 누울 수도 있었습니다. :) 문득 이 온갖 술값들을 굳이 '유흥'비용으로 기록하는게 의미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유흥에 가깝지도 않고 고작 편의점에서 술을 좀 사고 안주를 배달시켜 먹는 행동에 유흥이란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지 않나 싶었습니다. 잠깐 고민해보고 유흥 계정을 닫고 술값을 식비에 포함해서 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난김에 가계부에 다른 변경사항을 적어보면,

식비와 외식비 통합

이건 마음먹고 가계부를 쓰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 반년쯤 지난 다음에 맨 먼저 한 일입니다. 처음에는 식비와 외식비를 구분했는데 제 생활을 보아하니 외식비 비중이 높았습니다. 미디어에서 항상 들려오는 이야기는 외식비를 줄여서 돈을 아끼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어느 미디어에서도 거기 들어가는 시간비용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현금흐름을 개선하는 관점에서는 외식비를 줄이려는 노력이 의미있는 행동이겠습니다만 개인의 시간을 마음껏 전체 식비를 감소시키는데 사용하자니 저는 요리에 딱히 취미가 없었습니다. 이때도 오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외식비 계정을 닫고 식비와 통합했습니다. 이후 미디어에서 들려오는 온갖 이야기로부터 느끼는 죄책감이 사라지고 마음편히 시간을 사는데 돈을 쓸 수 있었습니다.

아이클라우드 스토리지 비용을 통신비로 변경

아이클라우드 스토리지에 한달에 3천 얼마정도 돈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비용을 처음 기입하려고 할 때 어떤 계정으로 분류해야할지 난감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오피스 365 서브스크립션이나 웹호스팅 비용도 그랬습니다. 어느 한 계정으로 정의하기에는 광범위한 일상에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비용을 '생활비' 계정으로 퉁치자니 그들과는 묘하게 맥락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들을 묶어 그냥 소프트웨어 구입 비용에 뭉뚱그려놨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날 생각해보니 이들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구분할 수 있어 보였습니다. 아이클라우드 스토리지는 내 아이폰을 더 편안하게 사용하기 위한 비용인데 아이폰에는 이동통신사에 지불하는 통신비용과 애플에 지불하는 아이클라우드 스토리지 비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통신비' 계정으로 묶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명확하지 않은 소프트웨어 구입비용 계정에서 아이클라우드 스토리지 항목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오피스 365 서브스크립션은 생활비로, 웹호스팅은 자기계발비용 정도로 구분하고 소프트웨어 구입비용 계정을 닫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거의 확정된 상태이지만 아직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결론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비용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지기도 하고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생활의 가치와 내가 생각하는 가치 사이에 차이가 생기기도 하면서 가계부 기록 체계가 조금씩 변해갑니다. 전반적으로 점점 더 단순하게 기입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 흐름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가 가계부에 반영되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 2019-02-24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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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start.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03-10 22:22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