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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림원 바이크컴퓨터 사용기

빠른 결론: 사지마세요. 사용기 부분만 읽으려면 현실부터 시작하세요. 아니면 결론만 보세요.

기대

1년 전에 킥스타터에 '트림원'이라는 바이크컴퓨터 백킹1)이 올라왔습니다. 그때까지도 바이크컴퓨터는 대강 가민 엣지 시리즈가 가장 많이 사용됐습니다. 새롭게 나타난 와후 엘리먼트가 그나마 괜찮아 보였고 브라이튼을 비롯한 군소 장치들은 저걸 도대체 왜 돈 내고 구입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적은 사용자 수와 신뢰성 없는 동작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고 가민 엣지 시리즈가 훌륭했던 것은 아닙니다. 바이크컴퓨터 시장에 거의 처음부터 있던 덕분에 오랜 기간에 걸쳐 적당한 수준의 기능과 신뢰성을 확보한 정도입니다. 현대에 이르러 배터리시간, 코스 내비게이션, 외부장치 연결 기능은 형편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배터리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주제는 가민 엣지 바이크컴퓨터에 비해 스마트폰이 압도적으로 더 잘 했고 그렇게 몇 년 지나자 바닥에 떨어져 깨인 눈물젖은 $1000 짜리 스마트폰과 멍청한 가민 엣지 사이에 비집을 만한 기회가 생기는 듯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 트림원 바이크컴퓨터가 나타났습니다.

가민 엣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배터리시간 평가는 딱 두 가지입니다. 가민 배터리가 한번도 부족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항상' 배터리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제 경우는 후자였고 이유는 한번에 12시간 이상 라이딩할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USB포트가 둘 달린 외장배터리는 장거리라이딩에 항상 전조등과 바이크컴퓨터를 항상 충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장거리 라이딩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가민 엣지는 스펙 상으로는 15시간 정도 동작한다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코스 내비게이션 기능 사용, 낮은 기온에 노출, 여러 센서에 연결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 10시간도 채 안되는 시점에 배터리 부족 경고가 나타나곤 합니다. 자전거 핸들은 항상 USB케이블이 너덜너덜 감겨있었고 낙차라도 한번 했다가는 이 모든 장비가 한번에 바닥에 내팽개쳐질 수 있었습니다. 불만이 슬슬 커질 무렵 킥스타터에 나타난 트임원의 컨셉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스마트폰은 더 강력한 CPU와 거대한 배터리가 달려있습니다. 기압계와 나침반, GPS센서도 달려있고요. 이 장치는 장거리 라이딩에 필요한 모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만 단 하나, 그 비싼 가격에 비해 부서지기 쉬웠습니다. 자전거 핸들은 생각보다 각박한 환경이었고 굳이 낙차하지 않더라도 강한 진동이 몇 백 킬로미터 동안 유지되면 멀쩡한 유리에도 금이 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바이크컴퓨터를 앞에 달고 스마트폰은 저지 뒷주머니나 파우치에 넣고 있어도 바이크컴퓨터가 스마트폰의 자원을 끌어다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는 훌륭해 보였습니다. GPS도 갖다 쓰고 고도계도 나침반도. 거기에 파워미터나 케이던스센서도 끌어다 쓴다면 자전거 앞에 달린 바이크컴퓨터는 거의 모니터 역할만 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배터리를 절약하면 저는 스마트폰 배터리만 신경쓰면 됐고 모니터를 켜지 않는 이상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습니다. 그렇게 훨씬 오랜시간 배터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림원의 컨셉은 매력적이었습니다. 최대 100시간 이상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 꽤 신빙성 있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30만원 가까운 금액을 내고 백킹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시즌온 할 즈음이 됐지만 '예상대로' 기기 배송은 딜레이됐습니다. 저는 여전히 익숙한 가민 엣지를 들고 시즌을 시작했고 여전히 달리는 내내 충전 케이블이 핸들에 감겨 있었고 비슷한 가격대의 가민 신제품2)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또 한 시즌이 지나가고 11월 초에는 자전거 출퇴근을 마무리하고 실내자전거3) 로 전환하면서 이번 시즌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시즌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반 년 늦게 제품 제작이 완료되어 배송을 시작했고 실외 시즌을 접기 직전에 실제 물건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현실

위에서 스마트폰의 자원을 끌어 쓰는 바이크컴퓨터를 설명했지만 사실은 좀 회의적인 생각도 있었습니다. 현대의 바이크컴퓨터는 생각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고 또 생각보다 더 많은 기술의 집합입니다. 가령 하드웨어를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스마트폰을 끌어들인 이상 하드웨어의 펌웨어, 아이폰 소프트웨어, 안드로이드 소프트웨어, 웹 서비스 등 바이크컴퓨터 하나를 위해 신경써야 할 분야가 너무 많았습니다. 또 스트라바4)처럼 GPS센서에만 의존한 고도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자체 지리정보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간신히 하드웨어와 펌웨어 개발력을 가진 조그만 회사가 진입하기에는 그리 만만하지 않은 장치였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동작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고 예상하고 기대치를 낮추던 중이었습니다. 일단 벽돌이 아닌 물건이 배달된 것 만으로도 한 75%정도는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안 남은 자전거 출근길에 트림원 바이크컴퓨터를 거치하고 출발했습니다. 물론 이 기계를 조금도 신뢰할 수 없었으므로 가민 엣지 역시 주머니에 넣어뒀습니다. 리모트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 주머니에 있던 가민 엣지도 기록을 시작했습니다.

짧은 남은 시즌 기간 동안 트림원을 달고는 1000킬로미터도 채 달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론은 기 기계를 단독 사용해 내년 브레베 시즌을 시작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로 요약됩니다. 동작을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이 기계는 위에서 이야기한 '센서 몇 가지가 달린 스마트폰 모니터'라는 컨셉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치 자신이 아이폰이기나 한 것처럼 지금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제조사는 스마트폰과 연동해 장시간 배터리가 유지될 거라고 주장했지만 브롬톤으로 고작 100킬로미터를 달린 날 집에 돌아와보니 가민 엣지는 65%, 트림원은 38%의 배터리 용량이 남아있다고 표시됐습니다. 이 추세라면 가민은 가장 짧은 브레베를 감당해낼 수 있겠지만 트림원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배터리가 아니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제가 알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가령 스마트폰과 어떤 이유로는 연결이 끊겨 트림원 기계에 달린 센서들을 직접 사용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과 연결은 어떻게, 왜, 언제부터 끊어졌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기계는 아무런 피드백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모드를 전환한 모양이고 그냥 조용히 배터리를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눈치채기 전까지 제게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트림원에 문제가 생기면 그냥 주머니에서 가민을 꺼내 바꿔 달면 그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30만원이나 낸 기계의 동작을 신뢰할 수 없어 가민을 항상 백업으로 들고다니는 시나리오를 상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알루미늄으로 된 껍데기는 깔끔하고 예쁩니다만 이걸 들고 연말 페스티브5005) 라이딩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깔끔은 표면은 영하 10도 미만의 기온을 기기 안쪽으로 원활하게 전달해 배터리 안의 화학반응을 가민 엣지보다도 효과적으로 멈출 거라고 예상합니다. 또 가민 마운트와 호환되지만 평평한 뒷면 덕분에 기기를 정확하게 조준해서 거치하기 어렵습니다. 아이폰 기준으로 소프트웨어는 동작하기는 하지만 특유의 투박하고 아이폰 사용자들의 감을 따라오지 못하는 인터페이스를 자랑하며 가민 특유의 '막무가내 업데이트'도 여전합니다. 난 지금 스타트 누르고 출발해야 하는데 막무가내로 펌웨어 업데이트 하는 건 분명 가민으로부터 배워왔을 겁니다. 스마트폰 없이는 센서 하나 추가할 수 없고 인도어 사이클링에 사용할 수도 없고 또 스마트폰 없이는 밝기를 조절할 수 조차 없습니다. 모니터 컨셉은 훌륭하지만 이렇게까지 컨셉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결론

이 기계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고 여전히 괜찮은 컨셉입니다만 이 기계에 30만원과 1년을 투자해서 얻은 결론은 우리들이 가민 엣지 바이크컴퓨터를 사용하며 가민을 욕하는 것과 달리 이 비즈니스는 생각보다 복잡한 기술적 디테일을 요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디테일을 달성하려면 시간이나 돈이나 인력 중 적어도 둘 이상은 갖춰야 하고요. 하지만 트림원의 제조사가 이들 중 적어도 하나를 갖추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쿨하게 스마트폰 앱을 단독으로 사용할 때 고도정보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말로부터는 자체 지리정보를 운용하는 스트라바가, 고작 100킬로미터 주행에 70% 넘는 배터리를 소모해버리는 점으로부터는 이제 전용 외장배터리를 지원하는 가민 엣지가, 폰과 연결이 끊기자 그대로 사라져버린 코스 내비게이션은 스마트폰의 음성안내 기능이 떠올랐습니다. 제대로 동작하는 파워미터가 드물다는 점 같은 건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라이딩에 크리티컬하지도 않은 것 같아서요. 그리도 다시 한 번 이 비즈니스가 가민 엣지가 구린 것 만큼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기계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고 여전히 괜찮은 컨셉입니다. 하지만 그건 소프트웨어가 훨씬 더 정교해졌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전에는 이 기계는 추천할 수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 기계에 정교한 소프트웨어가 들어갈 때까지 개발자들이 버틸 수 있을지도 걱정스럽습니다.

추가.

저녁에 즈위프트 타면서 켜놔봤는데 1시간 내내 케이던스와 심박을 제대로 표시했지만 (파워미터 화면은 내가 안 만들어놔서 못 봄) 나중에 로그를 뽑아보니 처음 6분 23초어치만 남아있었습니다. 오동작은 둘째 치고 그냥 동작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킥스타터를 통한 제품이 아니었다면 좀더 많이 열받아 내 돈을 돌려받기 위해 강력하게 노력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제대로 된 소프트웨어 지원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구입하지 마세요. (다행히도 딱히 구입할 방법은 없는 것 같지만.)

게임디자인 윤리

제목과 별 관계 없는 앞부분을 건너뛰려면 페이션트 원 미션부터 보세요.

히트맨

이 세상에 히트맨이라는 게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어쩌다 이 게임을 알게 됐는지를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프랜차이즈 중 일부가 왜 내 스팀 라이브러리에 나타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곤란하도록 무료한 시간을 못 이긴 궁금함으로 게임을 설치해봤지만 정말 오래된 게임처럼 보였고 몇 분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습니다. 마치 저 유명하고도 위대한 툼레이더 프랜차이즈의 첫 번째 게임을 실행했다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블리자드 페이스팜'을 하던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히트맨 프랜차이즈 게임을 영원히 플레이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히트맨2의 확장팩 스테이지 중 하나인 'Last Resort'를 플레이한 감상6)을 읽게 됐습니다. 글은 충분히 흥미를 끌고 있었고 첨부된 영상들도 재미있어 보였습니다.

스팀에서 찾아보니 신기한 방식으로 팔고 있었는데 요즘 게임답지 않게 첫 스테이지를 데모로 공개해놓고 나머지 스테이지를 따로따로 구입하거나 스테이지 일부를 묶어서 판매하거나 전체를 한번에 구입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상품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상품이 너무 많아서 내가 원하는 스테이지가 포함된 패키지가 뭔지 한참을 쳐다봐야 했고요. 일단 데모로 공개된 첫 스테이지를 첫번째 주말 내내 플레이했습니다. 내 목표는 쉽게 암살할 수 있었지만 오랜 옛날 데모 게임의 첫 스테이지를 씹고 뜯고 맛보며 온갖 방법으로 가지고놀기를 반복하던 경험과 비슷해 신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렇진 않았지만 마치 게임을 종료할 때 구입 문의 전화번호가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히트맨2 데모를 마르고 닳도록 플레이한 다음 본편을 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그때 구입한 스탠다드 에디션에는 확장팩에 포함된 'Last Resort' 스테이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몇 시간 후에는 알게됐지만요.

그 후로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플레이했습니다. 목표를 한번, 또 한번 암살할 때마다 게임은 새로운 헛점을 슬쩍슬쩍 내보이며 다음 플레이를 유도했습니다. 히트맨의 세계는 실제 세계와 비슷하지만 그런 구조물에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놓은 헛점은 마치 퍼즐처럼 제가 똑똑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했습니다. 한동안은 목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거하는데 몰두하고 그 다음에는 목표 이외에는 아무도 죽이지 않는데 몰두했습니다. 오랜 시간 플레이한 나머지 눈을 감으면 뒤통수에 바코드가 그려지고 길 가다가 다른 사람 뒤통수만 보면 Q를 눌러야 할 것 같았습니다. 뭄바이에서 목표들을 제거한 다음 동전 두 개가 없어 택시를 못 타고 걸어서 탈출하며 다이애나에게 '아 진짜 너무하네. 돈좀 넉넉히 줘라'라고 육성으로 말하기도 하고요. 결국 확장팩을 샀고 또 리메이크 스테이지도 샀습니다. 각각을 마르고 닳도록 플레이했고요.

페이션트 원 미션

히트맨2 리메이크 스테이지는 묘하게도 전작의 스테이지를 최신 환경에서 다시 제작한 것들입니다. 전작의 설정과 배경에 히트맨2의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레벨은 히트맨2에서 경험한 것에 비해 좁고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며 레벨디자인 철학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같았고 꽤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가된 미션에는 '페이션트 원'이라는 4개짜리 미션 팩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전 세계에 위험한 바이러스를 사용한 테러를 계획한 목표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방콕의 아름다운 야경을 목표에게 접근해 가며 호텔 밖 창문을 통해 잠깐씩 훔쳐봤습니다. 방콕엔 가본 적 없지만 가보게 된다면 꼭 야경을 보고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이탈리아와 미국을 거쳐 마지막 스테이지인 홋카이도에 도착했습니다. 만족스러운 게임플레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페이션트 원' 스토리의 마지막 스테이지인 홋카이도는 설정 상 위험한 바이러스의 첫번째 감염자이자 숙주가 기거하는 홋카이도 어딘가의 강력한 격리시설에 잠입해 '페이션트 원'과 현재의 담당의를 암살하는 겁니다. 강력한 격리시설 답게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외부인의 침입에도 강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느 히트맨 스테이지답게 삼엄한 보안 속에서도 곳곳에 예쁘게 만들어놓은 헛점이 게임플레이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브리핑에서 이야기했지만 대강 듣고 넘어간 바이러스의 존재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바이러스의 개발자이자 현재 숙주인 오웬 케이지는 강력하게 격리돼 있었지만 나머지 NPC들이 이동함에 따라 시설에 바이러스가 퍼집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는 것은 저 자신도 포함되고요.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부주의하게 움직이는 스탭들을 적절한 방법 (주로 망치로 머리를 내리침) 으로 통제해 물리적 헛점을 통해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도록 하고 나 자신 역시 방호수단을 찾아야 (빼앗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플레이를 익히기 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잠깐 다른 경비원을 제압하는데 정신이 팔린 사이 바이러스가 아랫층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NPC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마주쳐 지나가는 사이 시설에 바이러스가 광범위하게 퍼져버렸습니다.

얼른 근처에 있던 방호복 입은 누군가를 렌치로 때려눕히고 방호복을 주워 입었습니다만 맵을 살펴보니 오웬 케이지 외에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든 사람들이 목표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다이애나는 통신으로 어쩔 수 없이 감염자들도 처치해야 한다고 말해줬습니다. 이 상황은 제가 디자이너가 요구하는 게임플레이를 늦게 눈치챘고 또 디자이너가 의도한 압박에 빠르게 반응하지 않은 탓입니다. 아마도 언어에 좀 더 익숙했다면 브리핑에 지나간 바이러스의 특징을 좀 더 마음에 담아뒀을 겁니다. 또 바로 앞 스테이지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병사들을 저격해봤으니 이런걸 짐작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계산된 압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저에게 게임은 강한 패널티를 부여했습니다. 이제 암살 목표는 두 명이 아니라 수 십 명이었습니다.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려면 이 많은 목표를 다 죽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별로 특별한 플레이는 아닙니다. 비디오게임의 여명기에는 나치에게 총을 쐈고 또 괴물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좀비들에게 총을 쐈고 게임 속에서 나와 같이 총을 든 동업자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이렇게 총을 쏘는 대상에게 의미있는 설정을 부여한 이유는 이제는 더이상 특별하지도 않은 플레이이지만 이 안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인 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득이하게 게임 속에서 내가 총을 쏴야 하는 대상이 같은 인간이더라도 최소한 게임 속의 나와 똑같은 동업자였습니다. 다만 나와 같은 편이 아니어서 내 총알을 맞아야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사람 모양을 한 상대는 좀비로 표현됐습니다. 그 온갖 게임의 수많은 좀비들은 좀비를 총으로 쏘는 게임이 인기있어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은 좀비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총으로 사람을 쏘는 게임이 윤리적인 한계 안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트맨의 이 홋카이도 미션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목표로 바뀌어 내가 죽여야만 하는 상대가 되지만 이들은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었고 총을 든 나를 보고 도망쳤습니다. 이들이 다른 상대와 다른 점은 목표로 표시된다는 점, 가끔 기침하는 애니메이션을 재생한다는 점 정도였습니다. '노 러시안' 미션에서는 최소한 내가 테러집단에 잠입한 정보기관의 요원이고 어쩔 수 없이 민간인에게 총을 쏘는 테러에 동참하는 설정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미션의 끝에 나 자신이 테러집단의 수장에게 발각되어 제거당하며 끝납니다. 이런 설정에는 결코 이런 행동들이 정당화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된다는 메시지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는 방호복을 입고 무기를 든 압도적으로 강한 입장의 암살자이고 내 앞에 남은 사람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명인가를 죽이다가 '맨헌트'를 잠깐 플레이할 때 느끼던 두통과 구토감을 느껴 게임을 그만뒀습니다. 그렇게 페이션트 원의 홋카이도 미션은 클리어하지 않은 상태로 남았고 또 그렇게 신나게 플레이했던 히트맨2 역시 더이상 플레이하지 않은 채로 남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패널티 디자인은 제게 놀랍도록 강한 압력을 가한 셈입니다. 시설 내에 바이러스가 퍼질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제게 그걸 최대한 빨리 막을 강력한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실패할 때 제가 받을 패널티는 충분히 강력하지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게임디자인의 윤리적인 측면을 벗어나버렸습니다. 애초에 이 게임디자인이 매스 슈팅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혹시 그렇게 해석될 여지를 줄이기 위해 감염자를 좀비로 표현하고 엄브렐러사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괴물로 만들고 민간인에게 총을 쏜 내 얼굴에 총구가 들이대지며 나와 똑같은 무장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었어야 합니다. 비디오게임을 개발하는데 그 정도의 디자인 윤리는 지켜야 합니다. 의도든 아니든 이 디자인은 그 윤리를 지키는데 실패했습니다.

· 2019-11-17 19:45

자전거 공도주행

가끔 자전거를 타고 서울시내에 들어갈 일이 있습니다. 웬만하면 자전거도로 위주로 다니지만 자전거도로가 시내 곳곳까지 연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공도에 들어갈 때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웃긴 글자를 바닥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자전거우선도로'라는 글자입니다. 자전거 그림도 그려져 있고요. 그런데 그냥 도로 위에 페인트만 칠해놓은 거라 무슨 기능인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자전거우선도로는 여느 자전거도로처럼 자전거도로망끼리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았고 자동차는 내 앞뒤로 똑같이 달렸습니다. 똑같이 나를 스쳐 지나갔고 똑같이 내게 경적을 울렸고 똑같이 내 앞을 가로질러 우측 차로로 진입했습니다. 자전거도로는 확실히 서울 시계를 지나면 좋아집니다. 과천 근처 자전거도로처럼 만들기 싫은걸 억지로 만들어 1미터도 안되는 폭에 양쪽 차선을 그려놓은 '만들기싫으면만들지마그냥' 자전거도로에 인류애를 상실했다가도 한강에 가까워지고 서울시계를 넘어가면 자전거 세 대가 병렬주행해도 괜찮을 정도로 넓어지는 자전거도로에 다시금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물론 가끔 정말로 세 대가 병렬주행하는 꼴을 보면 좀 곤란하긴 합니다만.

자전거우선도로는 그렇게 눈에 띌 때마다 하루 일과에 지친 마음을 조금은 웃겨 줍니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공해 없는 교통수단을 홍보하는 행동은 하고싶고 그렇다고 실제로 자전거가 거리에 나와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고싶지는 않고 또 그렇다고 자전거도로망을 확충하는데 돈도 쓰기 싫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페인트통을 집어들고 공도 한쪽에 자전거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안 남습니다. 자전거우선도로는 아무 기능도 없습니다. 그 자전거우선도로끼리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기존 도로망과 차선이 정리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도로망 간의 연결은 고사하고 우측 도로가 나타나면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끊깁니다. 큰 도로에서 바깥차선으로 주행할 때 이런 우측 도로를 직진하는 요령은 왼손으로 수신호하고 바깥차로의 중간으로 나온 다음 - 중간으로 안 나오면 진출하는 뒷차가 나를 깔아뭉갤테니까 - 그대로 직진하는 겁니다. 하지만 서울시내의 자전거우선도로 (피식) 는 항상 자동차로 가득하고 내 왼손 수신호에 관심을 가지는 차량도 없습니다. 내가 차로 중앙으로 나오면 0.0001초 안에 뒷차가 상향 켜고 경적을 울립니다. 자전거우선도로요? 자전거운전자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칠해둔 거라고 굳게 믿습니다. 차라리 지하철 유리벽에 붙은 웃긴 시를 적어두는 쪽이 더 효과적일겁니다.

야간에 하이비저빌리티재킷 (aka 형광바막) 을 입고 달리는 이유는 자동차 불빛에 가시성이 좋기 때문입니다. 차에 잘 보이면 차들이 날 보고 적당히 운전해줄 거라고 예상하기 때문인데요, 가끔은 그렇고 가끔은 안 그렇습니다. 가령 자전거 운전자가 보이면 적당한 폭을 유지하고 지나가는 차량이 일부 있는 반면 대부분은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 지나가거나 나를 도로 밖으로 밀어내며 (실제로 스치고 지나감) 지나갑니다. 오히려 내가 검은 옷이나 광학미채라도 입고있었으면 원래 지나가던 대로 도로 중앙으로 지나갔을텐데 하이비저빌리티재킷을 걸치고 있으니 오히려 더 정확히 위협운전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인스타그램에 볼보에서 개발했다는 사람한테 무해하고 그래서 사람한테 뿌리는 형광반사스프레이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밤중에 도로에 나가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양인들이 와 이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하는 답글로 도배되는 찰나 또 다른 양인 한 명이 우리는 반사조끼에 전조등에 후미등에 발목띠에 헬멧 뒤에 후미등도 붙이면서도 항상 위협당하는데 이제는 몸에 스프레이질까지 하라는 거냐며 광분하는 답글을 남겼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전거우선도로로 시작된 줄 알았던 멍청한 자전거정책이 서울시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입니다.

서울시에서는 일년에도 몇 번씩 여기 저기 도로를 막아가며 자전거 행사를 합니다. 예쁘게 분 단위로 교통통제한 다음 널직한 길에 콘과 경찰을 쭉 깔아놓고 사람들을 달리게 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평소에는 예쁜 콘도 경찰도 없는데요. 그렇게 거리에 자전거를 가지고 나와도 괜찮다고 사람들을 속이고 아무 후속대책 없이 바닥에 페인트질만 해놓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습니다. 개인적인 제안은 그 자전거행사를 한번 교통통제 없이 해보는 겁니다. 원래 규칙대로 자전거가 공도주행하는 규칙에 맞춰 행사를 진행하는 겁니다. 평소대로 신호도 지키고 평소대로 바깥 차로 오른편으로 주행하고 좌회전은 훅턴하고 직진은 우측차로의 우측에서 대기하고요. 그렇게 달리다 보면 내 앞으로 정확히 끼어들어 정차하는 택시, 날 스치며 (정말 스치며) 지나가는 버스, 자전거를 길 밖으로 밀어내며 운전하는 트럭, 직진신호에 내 앞으로 우회전하는 차량과 마주친 사람들이 겁먹고 그 자리에 자전거를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런 꼴을 봐야 도로에 페인트질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까 싶습니다.

뭐.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또 그렇게까지 못할 건 아닙니다. 시내를 자전거로 이동하는건 위에 시니컬하게 한 이야기 속 경험만큼 그렇게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바닥에 페인트질을 볼 때마다 이 페인트가 올바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 2019-11-16 21:44

인력구성

우연히 A, B, C급 인재를 언급하는 글을 봤습니다. 수 십년 전부터 닳고닳은 떡밥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 정보사회를 구축한 전산학은 초기 극단적인 천재들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또 현대에 범인들도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 비디오게임 개발 역시 초기의 천재들이 그 근간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스포츠는 또 어떤가요. 산업의 태동기에 전설적인 천재들에 의해 시작되고 발전했습니다. 그 분들 덕분에 저 같은 어정쩡한 사람들이 월급도 받고 사대보험의 푹신함7)을 느낄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이름을 알 수 있는 산업의 여명기에 기여한 분들을 기억하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또 제가 모르는 분들을 더 알아보려는 일종의 역사를 배우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거와는 달리 현대의 인력구성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본 주변의 환경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현대에도 이 산업에 그런 격차를 가진 인력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수준의 인력은 산업을 떠났습니다. 아직도 이 업계에 남아 부조리를 질소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최고 수준의 인력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사회를 구성하는 좁은 층위 사이에 영원히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내고 실행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최고 수준의 인력이라고 하기 어렵고 그래서 업계에 남아있습니다. 이들은 산업의 태동기에 천재들이 이룩한 기반 위에 남아 아주 느리게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이번 세대가 끝나기 전에는 바닥을 만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운입니다.

대외에는 인재를 원한다고 광고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최고 수준의 인력은 매달 소요되는 개발비용을 꼼꼼히 계산해야 할 정도로 비싸고 평범한 우리는 더이상 시장에서 그정도를 감내할만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세대 전부터 유일하게 채득한 패스트팔로어 전략으로 서로 눈치를 봐 가며 경쟁하지 않는 시점에 제품을 출시하고 출시 시점에 가까운 과거에 가장 유효했던 비즈니스모델을 빠르게 적용한 결과물을 내보내고 관찰자의 전두엽 맛이 진하게 밴 노이즈 가득한 포커스그룹테스트 결과에 따른 광고비용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함부로 충분히 훌륭한 인력을 구입할 모험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분명 범인보다는 나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범인이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오히려 범인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장의 수지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현대의 개발팀은 B, C급 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B급 인력의 업무는 C급 인력이 개발에 기여할 수 있도록 개발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맥락을 이해하지 않아도 좁은 시야의 요구사항에 맞는 숫자만으로도 다른 프로젝트가 시장에서 달성한 결과 - 그게 성공이든 실패든 - 를 재빨리 복제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엑셀의 다음 행에 윗 행의 숫자에 1.01을 곱한 숫자를 반복해서 채우기만 해도 적당히 동작하는 시스템을 만듭니다. 엑셀을 만져 숫자를 채우는 건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누구라도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현대 개발팀의 인력은 이렇게 구성됩니다.

· 2019-11-16 17:58

개발력

'개발력 하나는 자신있다'는 어떤 개발사 대표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게임성'처럼 알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마치 개발력이라는 어떤 인게임 캐릭터 파라미터가 회사에 남아 시간이 흐르고 게임을 개발함에 따라 수치가 증가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판교에 있는 회사 상당수는 그 파라미터를 회사에 남기는 방법을 모릅니다. 실은 알고는 있지만 시도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시도한 적이 없으니 정확히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도 잘 모릅니다. 모르니까 너무 무섭습니다. 다만 술자리에서나 전설처럼 한국 개임개발은 이래서 문제라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개발력은 회사에 남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개발력은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 각각에게는 남는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가 종료되고 스폰서가 본사로부터 법인을 잘라내면 개발력은 스탭 각각에 남아 판교를 비롯한 각지로 흩어집니다.

마치 레벨과 전투력 같은 관계입니다. 레벨은 회사에 속한 파라미터이지만 전투력은 장비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장비는 스탭들에 속합니다. 스탭들이 떠나면 레벨은 그대로 남지만 그 레벨만 믿고 평소 플레이하던 사냥터에 들어갔다가 방금 구입한 마나포션 1000개 패키지가 순삭됩니다. 어쩌면 개발력에 자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레벨도 높고 전투력도 높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에는 회의적입니다. 정말 개발력이 있다면 레벨을 자랑하는 대신 장비를 자랑할 겁니다. 그리고 혹시 실수로 갈아버릴까봐 인벤토리에 락도 걸고 귀속을 붙이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는 곳은 몹시도 드물어 보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개발력에 거는 자신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2019-11-16 18:35

10월에 읽은 책 정리

지난달에는 (글을 쓰는 지금은 11월 중순이니까)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와 '채식주의자'를 읽었습니다. 10월에 그렇게 읽을 시간이 부족했나 싶었습니다. 실제로는 포괄임금제가 폐지되고 지난 십 수년 동안 전설로만 전해지던 초과노동시간에 임금이 정산되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으로 노동시간이 짧아지고 있었거든요. 회사는 초과노동시간과 인사평가등급을 정비례시키려고 하는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간을 더 만들어 더 읽고 더 생각할 시간을 늘렸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지금까지 읽어온 작가님의 여느 이야기와 비슷한 작고 소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에 나올 법한 거창한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분명 학교에서 이 주제를 배운다면 학부 1학년에 나올 법한 '어쩌구 개론!' 같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입니다. 작가님이 소소하게 그동안의 체험에 따라 자신의 글쓰기 노하우를 정리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다른 이야기 끄트머리마다 붙은 연도와 장소 이름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끝맺어진 순간의 장소를 떠올려보곤 했습니다. 이야기들은 제가 아는 그 장소 어딘가에 앉아있는 작가님과 그 주변 어딘가에 있을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이미지와 함께 끝나곤 했거든요.

책에는 글쓰기를 위해 개인의 생각, 주변 환경을 적절히 통제하는 방법, 일반적인 절차, 대략적인 도구, 천재지변, 비상수단, 마감의 중요성 등을 다룹니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당장에 글을 잘 쓰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저는 첫 부분을 쓰다 그반두는 사람이기보다는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이야기 전체를 생각해내지만 타이핑을 시작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거든요. 아니면 회사에서 문서를 작성해내고 나면 타이핑 체력이 0이 되어 키보드를 거부하는 증상을 보이기도 하고요. :) 하지만 이렇게 글을 못 쓰는 병에 걸려 키보드를 거부하는 증상으로부터 저를 건져올릴 작은 실마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채식주의자

서점 웹사이트에는 카트와 위시리스트 기능이 있습니다. 카트는 책을 보관했다가 결제하는데 사용하는 기능이고 위시리스트는 언제 구입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리스트에 넣어놨다가 나중에 구입하든지 아니면 지우든지 아니면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하는데 사용하든지 하는데 사용하라고 만들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위시리스트에는 단 한 권도 넣어둔 적이 없습니다. 일단 카트에 넣었다가 나중에 훑어보고 그 중 읽을 책을 골라 구입합니다. 카트는 나중에 등록한 책이 가장 위에 나타나므로 원하지 않게 후입선출 방식으로 책을 결제해 읽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흥미로운 책이 여럿 나타나 카트에 여러 권을 등록한 기간에는 더 일찍 등록한 책들이 뒤로 밀려 시간이 자나고 나중에 가서는 이 책을 카트에 보관한 이유는 잊은 채 책이 덩그러니 남아 궁금증을 자아내곤 합니다. 맞아요. 이 책도 언젠가 의지를 가지고 카트에 등록했지만 결제하지는 않은 채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그 위에 쌓인 책을 읽어내고 보관함 맨 위에 이 책이 나타났을 때 이 책에 대해 제가 아는 정보라곤 언젠가 이 책이 국외 어딘가에서 어떤 상을 수상했다는 짤막한 기억 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 정보도 없었어요. 책 표지에는 약간은 피곤한 듯 보이는 저자의 사진이 있었고요. 잠시 고민하다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목차엔 세 가지 제목이 적혀있었고 지난 몇 개월에 걸쳐 읽던 여러 작가님들의 단편소설집 목차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책 표지에 '연작 소설'이라고 적혀있었고 이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겠다는 정보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처음 읽기를 멈춘 때는 채식주의자 이야기가 끝나고 몽고반점 이야기가 시작된 다음 지인의 작업실에 홀로 도착한 화자를 지켜보는 장면이었습니다. 사실 영혜의 채식이 시작되기 전과 후의 이야기는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주변의 모든 세상으로부터 얻은 경험은 사람을 어떤 모양으로든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과 (맙소사) 사회의 시각으로부터 쉽게 온갖 단어들을 갖다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첫 이야기에서 영혜의 먼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온갖 이야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웠습니다. 다만 책 읽기를 멈춘 시점의 전개에 제 관점에서는 자연스러워 보이던 사람이 주변으로부터 어떤 시각으로 보이고 또 어떻게 대해지는지를 따라가다가 갑갑해져 읽기를 멈추고 잠깐 베란다 (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아파트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 찬바람을 들이마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덮어놓은 책에 읽어내지 않은 그 다음에 적혀있을 영혜의 납득할 수밖에 없는 주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상한 행동과 상태에 가족들의 (맙소사) 행동을 이미 끝까지 예상하고 있는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것만 같았습니다.

네. 이야기는 사실 조금 예상한 대로 흘러갔습니다. 마치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에 나오는 죽음과 바람의 법칙인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저를 고통스럽게 만들며 흘러가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다시 지우아빠 - 이름이 있었을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나는 - 의 이야기는 고통 다음의 번민의 감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야기를 읽을 때는 비판적인 혹은 회의적인 사고를 잠깐 꺼놓고 이야기가 움직이는 대로 머릿속을 흔들거리게 놔둔 채로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곤 하는데 영혜의 현재에 이르는 일생에 이입하던 머릿속이 잠깐이나마 형부의 감정에 이입하려고 시도하다가 여러 사람들을 휘감은 밧줄 같은 것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얼굴을 찌뿌리며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다가 그만 작가님이 쳐 놓은 함정에 깊숙히 빠졌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밀실에서 형부의 행동을 지켜보는 공범이 돼버렸고 다음날 아침 식탁에 엎드려 잠든 아내의 모습과 함께 단숨에 광장 한복판에 내던져져 거기 가득 모인 사람들, 출동한 병원 직원들, 주변에 구경하던 사람들의 경멸섞인 눈빛과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뭔가에 깜짝 놀라 깊은 잠에서 순식간에 깨어나는 느낌으로 그렇게 두번째 이야기 몽고반점이 끝났습니다. 아 맙소사. 내가 뭘 본 거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야기에서는 영혜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영혜를 이상한 사람 취급합니다. 때로는 어르다가 때로는 윽박지르는 듯 보이지만 한결같이 지극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이야기를 가로질러 가장 한결같이 예측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줄곧 같은 이야기를 해 온 사람은 오히려 영혜 뿐입니다. 영혜는 자신의 생에 전체에 걸친 폭력과 억압의 끝에 꿈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로 결정한 것 뿐입니다. 예상할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는 그 결정에 영혜를 제외한 주변 모두가 하나같이 두꺼운 책 한권을 가득 채울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이야기가 끝나갈무렵 병원을 나오면서 이야기에 따라 흔들리게 놔둔 머릿속을 잠깐 바로잡으며 잠깐이나마 이 다음, 그러니까 병원을 나가서 이 책에는 더이상 적혀있지 않은 그 다음의 현실을 생각해보려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습니다. 분명 지금까지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리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리 만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온갖 더러운 사람들이 이야기에서 떨어져나가고 한번도 이야기에서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된 적 없는 진짜 주인공들만 남았습니다. 이야기가 끝날 때 잠깐이나마 현실을 생각하던 자신을 그대로 멈춰 놓고 온전히 남은 주인공들을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읽은 책을 생각하다보니

네이비씰 승리의 기술을 읽고나서 한동안은 제 관점에서 수준 이하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이 정말 일을 망치자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장점은 있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할수록 이 책의 몇몇 주장이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이유는 좀 더 여러가지이겠지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무능하고 또 무능한 의지는 악의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리는 적의 대공망으로부터 살아돌아온 전투기의 총알자국을 보며 다음 전투기 설계에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가방에 담겨 샤크베이스로 돌아왔고 그들은 결코 책을 쓰고 리더십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함께 해야 이 불편함을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시간을 들여 생각한 끝에 이 책은 별로 추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전 기록: 10월, 9월, 8월, 7월, 5월, 3월, 2월, 1월

· 2019-11-16 21:13

오래된 항목 >>

blog/start.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11-17 14:50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