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사이드바

blog:start

윈도우 재설치

처음으로 윈도우 버전 뒤에 연도가 붙기 시작하던 시대부터 윈도우 재설치를 해 왔으니 더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윈도우 재설치입니다만 한때 조롱 대상이던 윈도우 재설치도 이미 십 수년 전부터는 더이상 그 이전만큼 불안하지 않았고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훌륭해졌기 때문에 윈도우 재설치 경험이 특별해졌습니다. 몇 주 전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멀쩡한 윈도우 시스템의 보안을 망가뜨렸다는 의심을 강하게 한 끝에 윈도우를 재설치했습니다. 재설치를 미뤄온 것 치고는 모든 과정이 부드럽게 진행되었고 업데이트가 좀 오래 걸리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대부분을 편리하게 설치할 수 있었고 데이터 백업과 복원에는 완전히 신경을 끌 수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패스워드를 저장하는데 사용하는 '1Password'의 인스톨 과정이 충분히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됐습니다.

멍청한 행동

시작은 몇 주 전에 PC에서 사용하려고 엑스박스원 컨트롤러를 구입한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유선컨트롤러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무선컨트롤러가 특별한 기술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데스크탑에 블루투스 동글이 달려있으니 사다가 인식시키면 사용 가능할 거라고 예상했고 별다른 조사 없이 컨트롤러를 주문했습니다. 주문할 때 동글이 포함된 버전과 포함되지 않은 버전이 있었고 의심 없이 동글이 없는 버전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컨트롤러를 인식시키려고 보니 블루투스 디바이스 목록에는 나타나는데 그걸 선택해서 인식시키려고 하면 매뉴얼에는 없는 일련번호 입력 과정이 나타났습니다. 매뉴얼에는 그냥 인식된다고 적혀있었거든요. 어지간한 블루투스 디바이스의 흔한 일련번호 몇 개를 입력해 실패한 다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이 잘못되려면 한번에 다 같이 잘못된다는 이야기가 딱 맞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글링을 시도했는데 애초에 구글링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여전히 제 머릿속에서는 아니 다 똑같은 블루투스인데 왜 전용 동글을 사용해야 하는건지 의심하고 있었고 구글은 제가 보고싶은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블루투스 동글에 엑스박스 컨트롤러를 인식시킬 수 없는지 묻고 뭔가 시도한 기록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몇몇은 블루투스 동글 드라이버를 최신으로 업데이트한 다음 시도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고 합당한 시도방법이라고 생각한 저는 드라이버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블루투스 동글은 구입한지 거의 10년이 되어 가는 물건이라 이미 제조사 웹사이트에서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시도를 그만뒀어야 하는데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출처가 불분명한 드라이버를 모아두는 사이트에까지 흘러가서 출처가 불분명한 실행파일을 실행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저는 결국 마이크로소프트 엑스박스 컨트롤러 전용 어뎁터를 따로 주문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보안 문제

십 수년 이전부터 윈도우는 이전 시대에 조롱받던 것처럼 불안정하지 않습니다. 또 쉽사리 오동작하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내가 컴퓨터를 사용하며 시도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응답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지난 몇 주 사이에 예상하지 않은 동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브라우저 윈도우가 사라져버린다든지 암만 내가 멍한 상태였다고 해도 내가 윈도우를 잠근 적이 없었는데 윈도우가 잠겨 핀코드를 요구한다든지 하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조작했는데 마이크로치매같은게 일어나서 내 행동을 까먹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습니다만 상황이 낮은 빈도로나마 반복되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윈도우 디펜더 오프라인 검사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아무래도 윈도우를 재설치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또 재설치과정의 귀찮음이 몰려와 이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별 생각 없이 윈도우 디펜더의 전체검사를 실행했는데 이번에는 윈도우 디펜더가 또 아무 메시지 없이 그냥 사라져버린 겁니다. 이쯤 되면 재설치를 더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부드러운 재설치과정

백업은 신경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재 모든 작업파일은 1테라바이트짜리 원드라이브에 전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고 당연히 모두 원드라이브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아무때나 로컬 스토리지가 파괴돼도 잃을 것이 없거나 거의 없었습니다. 그냥 상자에서 윈도우 USB메모리를 꺼내다가 꽂고 재시작해 설치를 시작했습니다. 설치는 수동으로 기존 파티션을 모두 삭제하는 시간을 포함해 십 몇 분 안에 끝났습니다. 설치과정에 마이크로소프트 계정을 입력할 때 좀 불편했습니다. 모든 패스워드는 1Password로 관리한 이래 가능한 긴 무작위 문자열로 되어 있었습니다. 덕분에 윈도우 재설치, 아이폰 재설정 등의 작업에는 처음 한번 암기가 거의 불가능한 문자열을 띄엄띄엄 입력해야만 하는 일이 생깁니다. 원타임패스워드를 설정하고 있었으므로 이게 어떻게 처리될지 걱정했는데 윈도우 설치 프로그램이 아무 문제 없이 원타임패스워드를 물었고 별 일 없이 인증과정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드라이버는 자동으로 설치됐고 주요 유틸리티는 Chocolatey를 통해 인스톨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부터 입수한 소프트웨어를 패키징하고 있는 걸까요. 거기까지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재설치를 시도하고 나서 채 1시간이 지나기 전에 이전에 사용하던 환경 거의 대부분을 돌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1Password의 훌륭하지 않은 설치과정

어지간한 소프트웨어의 인스톨과정은 딱히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엔비디아 드라이버 다운로드과정이 좀 거지같다고 생각했지만 딱 그거 하나만 문제였으니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패스워드 관리 프로그램인 1Password 설치과정은 좀 문제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1Password는 패스워드를 다운로드하기 위해 몇 가지 정보를 요구합니다. 서버이름, 이메일, 시크릿키, 마스터패스워드. 그런데 이미 설치된 상태에서 마스터패스워드를 입력할 때는 시큐어데스크탑을 통해 입력하는 버튼이 있었습니다. 제조사의 설명1)에 따르면 키보드 입력을 가로채는 소프트웨어가 설치되어 있을 때 시큐어데스크탑을 통해 입력하면 이를 어느정도 우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딱히 불편해보이지도 않아서 항상 마스터패스워드를 시큐어데스크탑을 통해 입력해 왔는데 1Password를 처음으로 인스톨하고 처음으로 등록하는 과정에는 이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윈도우를 설치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기는 했지만 내 시크릿키와 마스터패스워드를 그냥 데스크탑에서 그냥 텍스트박스에 그냥 키보드로 입력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 상태에서도 이미 키보드 입력을 도난당하고 있다면 1Password 설치 후에 시큐어 데스크탑을 통해 패스워드를 입력해봤자 헛짓입니다. 그렇다고 이 과정을 진행하지 않고서는 내 모든 패스워드에 접근할 수 없으므로 하는 수 없었습니다. 결국 1Password를 무사히 인스톨했지만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교훈

윈도우 재설치는 예상과 달리 부드럽게 끝났지만 결국 두어시간을 낭비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출처가 불분명한 드라이버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려고 시도했고 그 상태를 몇 주 동안이나 방치했습니다. 덕분에 어디까지 문제가 생겼을지 파악할 수도 없을 상황에 처했을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이번 경험으로 정말 정말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어떤 실행파일에도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소프트웨어를 테스트할만한 샌드박스 환경 같은 것이 있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또 윈도우 재설치 후에 맨 먼저 설치해야 하는 소프트웨어는 패키지매니저나 크롬브라우저, 엔비디아 드라이버가 아니라 원패스워드라는 것도 알게됐습니다. 인스톨과정이 완벽하지 않다면 운영체제 설치 후 맨 처음으로 설치하는 수밖에 없겠죠.

· 2019-06-29 12:14

존윅3: 게임 만드는 사람 관점에서

영화 '존윅 3'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존윅이 스포일링당할만한 영화는 아닐 수 있습니다만 스포일링에 민감하신 분이라면 나중에 읽어보시는 편이 낫습니다.

존윅3을 봤습니다. 존윅 시리즈의 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존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고 일하면서 하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가령 플레이어에게 시나리오를 설명하기 위해 게임을 진행하던 플레이어를 붙잡고 화면 위쪽에 스킵 버튼을 표시한 다음 구구절절 설명하는 행동이 쓰레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필요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면 존윅 시리즈를 본 다음부터는 그런 행동은 플레이어를 게임으로부터 내쫓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존윅을 본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그런 짓을 할 시간에 존윅은 57명을 더 죽입니다.

그 첫 영화에서 존윅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영화 전체를 할애했습니다. 굳이 존윅이 누구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행동과 상황으로 조금씩 조각을 맞춰갈 수 있을 정도로만 설명합니다. 굳이 영화 보는 사람의 집중과 템포를 망가뜨리지 않고서요. '존윅1'에서 인상깊은 설명방법 중 하나는 비고가 오렐리오에게 전화를 건 장면입니다. 아들을 때린 이유를 묻는 비고에게 오렐리오가 이유를 설명하자 비고는 '오…' 하고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이 영화가 존윅이 아니었다면 구구절절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비고의 오버액션으로 장면을 망가뜨렸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저 짧은 반응은 존윅이란 캐릭터 조각을 흥미롭게 맞춰가기에 적당했습니다.

두번째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게임규칙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컨티넨탈 그라운드에서 살인이 금지된 점은 이미 전작을 통해 설명했지만 그렇다면 그 규칙을 설정하고 운영하는 존재들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이 규칙 설명 역시 굳이 플레이어의 행동을 멈추고 튜토리얼을 띄워 화살표로 가리킨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같은 방식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단지 규칙을 설정하고 운용하는 강력한 존재들이 있다고 알려주고 영화 내내 조각을 조심스럽게 던져줍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게임 규칙 뒤에 서있는 존재들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정확히 뭔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명확히 알기 어렵지만 영화를 보는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세번째 영화로 이어집니다만 이번에는 전작에서 이어왔던 방식이 그리 훌륭하게 동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게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밸런스 조절에 실패했고 관객에게 알리지도 않고 장르와 전투시스템을 바꿔버렸고 나머지 스토리는 DLC로 판매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개봉이 한달이나 늦춰지는 바람에 그 한달 동안 기대를 부풀려 극장에 갔다가 스탭롤이 시작되자 한숨을 쉬게 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규칙 설명 실패

첫번째 영화에서는 캐릭터를, 두번째 영화에서는 그들을 둘러싼 규칙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영화에서는 본격적으로 그 규칙이 동작할 때 일어나는 일과 규칙을 결정하고 운영하는 존재들에 대해 설명해야 했는데 설명 방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규칙은 조각조각 나눠 순간순간 플레이어에게 전달해 주고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하이테이블과 그 위에 있는 장로들의 조직도를 조금씩 그려 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번에 전달하는 규칙의 양이 너무 많았습니다. 뉴욕 안의 러시아에서 주인공의 과거를 보여주고 바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모로코에서 조직도의 일부를 보여준 다음 영화는 순식간에 사막으로 옮겨가 조직도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뉴욕으로 떨어집니다. 듀디케이터의 등장은 영화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이를 포함해 존윅 답지 않게 한번에 너무 많은 설명을 시도한 나머지 영화는 기대와 약간 달랐습니다. 저는 여전히 존윅의 열혈모험활극을 보러 왔는데 화살표가 그려진 버튼을 눌러야 하는 튜토리얼을 보는 느낌이 간간히 들어 좀 답답했습니다.

밸런스 조절 실패

게임 난이도를 조절하는 일은 언제나 골아픕니다. 너무 어렵거나 쉽게 만들려면 게임의 핵심 메커닉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또 난이도 조절 방법을 고안해낼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라면 값싼 방법을 선택해야만 하는 일도 있습니다. 가령 던전을 만들었는데 갑자기 업데이트 하루이틀 전에 상위 난이도를 만들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치겠습니다. 그러면 급하게 몬스터들의 체력을 올립니다. 상위 난이도니까 체력을 한 4배정도로 올리면 되겠군요. 그래서 테스트해보니 던전 느낌이 이전과 많이 달라져버렸습니다. 이전에는 두세대 맞으면 나가떨어지던 몬스터들이 이제 훨씬 더 많이 때려야 할 뿐 아니라 때리기 위해 비용을 관리하는 플레이가 더 많이 필요해졌습니다. 전투시간이 길어졌고 한 장소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이전에는 몹들을 쓸어담으며 앞으로 전진하는 플레이였다면 이제는 체력버프를 받은 다음 한 자리에서 묵묵히 몹이 쓰러질 때까지 피를 깎는 플레이를 반복할 뿐인 이상한 던전이 완성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존윅의 한 장면은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컨티넨탈 뉴욕에서 버티기로 결정한 주인공들에게 하이테이블에서 목숨을 몰수하러 옵니다. 마치 미국 대통령의 비스트처럼 생긴 버스 두 대에 나눠 탄 중장갑 병사들을 상대하게 됩니다. 그런에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컨시어지가 존윅에게 이어질 새로운 게임 규칙을 설명해줍니다. 정확히는 존윅에게 설명하는게 아니라 관객들에게 설명하지요. 당신이 떠나있던 5년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짧게 줄여 말하면 방탄복이 훨씬 개선됐다는 식으로요. 그래서 어느정도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이게 게임플레이 느낌을 얼마나 바꿀지는 실제로 보기 전에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존윅 답지 않은 깝깝함이 업습해옵니다.

존윅의 기본 플레이는 총으로 사람을 쏘고 총알이 떨어질 때 격투로 전환했다가 다시 총을 쏠 수 있게 되면 총으로 사람을 쏘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총 이외의 행동은 총을 사용할 수 없을 때 잠깐씩 등장합니다. 그리고 총을 몸에 맞으면 아픈 애니메이션을 플레이하고 총을 머리에 맞으면 죽는 상태로 넘어갑니다. 이게 잘 어우러져 전투의 타격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게 이전 존윅 전투의 핵심입니다. 심지어 이번 영화에서도 모로코에서는 새로운 메커닉인 '개'를 추가하면서도 타격감을 훌륭하게 유지한 채로 존윅의 전투를 잘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하이테이블 병사와 전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규칙이 동일하지만 몹들의 체력만 올린 바로 그 느낌입니다. 컨시어지의 설명 부분에서 제가 기대한 것은 총이 권총에서 샷건이나 라이플 같은 좀 더 강력한 화기로 바뀌고 그에 알맞는 이펙트를 표시하며 이전과 비슷한 타격감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만 무기를 바꿨지만 타격감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총을 몸에 맞은 병사들은 맞는둥 마는둥 하는 애니메이션을 재생할 뿐이었고 애초에 머리는 체력을 깎을 수 있는 부위가 아니었습니다. 총알을 여러 대 맞춘 다음 잠깐 쓰러져 그로기 상태가 되면 그때 목 뒤에다 총알을 꽂아넣거나 헬멧의 플락시글라스를 열고 총을 쏘는 식의 메커닉은 재미있었지만 그 과정은 타격감 없는 병사들에게 총을 쏘는, 마치 체력버프 받은 다음 한 자리에 서서 지루하게 몹을 때리는 느낌이 들어 실망스러웠습니다.

장르와 전투시스템 변경

위에서 이미 조금 이야기해버렸지만 존윅 전투의 기본은 총으로 사람을 쏘는 겁니다. 격투는 총을 쏠 수 없을 때 총과 총 사이를 연결하는데 사용하고요. 이번 영화에서 초반 전투에 온갖 날붙이를 사용하는 전투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총을 쏠 수 없는 상황 상 나온 전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존윅 다운 병신같지만 멋있는, 그래도 병신같은 장면들로 가득했습니다. 사람이 칼에 베이고 찔리기를 반복하는 잔인한 장면이 가득하지만 그들을 합쳐놓은 결과는 웃기기 그지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단검을 계속해서 집어던지고 이미 시체에 박혀있는 단검을 재활용하고 적과 서로 눈치를 보며 유리장 안에 들어있는 무기를 꺼낸다든지 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총을 쓰지는 않았지만 존윅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병신같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초반에 이 날붙이를 사용한 전투는 뒤에 나올 보스전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보스전은 그리 존윅의 전투같지 않았고요.

네. 영화 뒤쪽의 보스전은 더이상 총을 사용하는 존윅의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존윅 1의 보스전 역시 총을 쏘는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존윅1 보스전의 격투는 꽤 당위성이 있었습니다. 영화 내내 비고는 과거에 존윅과 일했고 격투에 소질이 있으며 존윅의 어떤 면을 두려워하고 '아 쫌!!!'에 가까운 대사를 자주 말합니다. 그렇게 잘 설명된 캐릭터가 끝에가서 '존! 총 쓰지 말고 싸우자!' 라고 외치며 전투시스템 변경을 선언할 때 그게 그리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칼을 엄청나게 잘 사용하는 보스 캐릭터는 영화 초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그 위용을 과시합니다. 영화는 존윅인데 총 쏘는 장면보다 칼로 사람을 베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존윅이 이 캐릭터와 전투에 칼을 써야한다는 당위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디애나존스의 칼싸움 장면 같은 것을 상상했지요. 그게 병신같은 존윅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스전은 존윅의 전투와 달라 부자연스러웠고 이펙트는 너무 많이 재사용했으며 지나치게 심각했고 또 존윅의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이펙트 재사용

방금 이펙트 재사용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으니 이를 좀더 설명해보겠습니다. 영화 초반 전투에서 존윅이 도망친 좁은 골목에 온갖 깨질만한 물건이 늘어서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전구와 거울들요. 그리고 어째서인지 온갖 날붙이들은 유리장 안에 들어있습니다. 또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도 유리장이 즐비하고요. 그럼 예상할만합니다. 아. 전투 중에 저것들을 다 깨부수겠구나. 아니나다를까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유리장을 부수고 무기를 꺼내며 다른데로 집어던져도 될 사람을 굳이 유리장과 거울로 집어던지며 사람이 바닥에 엎어질 때 깨인 유리조각 이펙트를 함께 뿌리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는 배경의 사물들이 꽤 그럴듯하게 보였습니다. 이런 좁은 골목에 있는 날붙이를 전시하고 판매하는 가게라면 이렇게 생겼을 수도 있겠다 싶은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스전의 레벨디자인은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초반 전투에서 사용한 깨질 수 있는 물건이 널려있는 장소. 그나마 초반에는 개연성이 있었지만 보스전의 레벨디자인은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초현실적인 장소는 심지어 '존윅2'에서 이미 사용한 바 있습니다. 제작자들은 2편의 초현실적인 장소, 하지만 쉽게 깨지는 이펙트를 사용하기 어려웠던 장소에 3 초반에서 보여준 쉽게 깨지는 이펙트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을 조합한 레벨디자인을 하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결과는 관객의 감각과 어긋나 칼을 휘둘러서 대미지를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데다가 규칙적으로 유리장식에 사람을 쳐박기를 반복하는데 지루함마져 느껴질 판이었습니다. 이전에 사용했던 이펙트를 그대로 들고와 개연성이 부족한 레벨디자인에 과도하게 사용한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스토리는 DLC

그리고 영화는 … 수많은 강력한 액션씬을 집어넣다보니 스토리를 진행시키기에 시간이 부족했고 스토리를 완결하지 않고 끝났습니다. 어디서 잠깐 읽은 글에 의하면 존윅 4 제작이 승인됐다고도 합니다만 영화 자체에는 그런 힌트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어른들의 사정 상 일단 촬영해서 시위를 하고 경영진으로부터 차기작 승인을 받아내려는 부득이한 전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존윅과 그 결말을 기대한 사람들에게 전쟁의 시작만을 보여준 다음 본격적인 전쟁과 결말은 다음 영화로 판매하겠다는 두시간짜리 광고를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모피어스도 나오고 네오도 나오는 영화였다면 차라리 그 영화의 2편이 끝날 때처럼 '계속' 하고 끝났더라면, 그 사실을 미리 알렸더라면 이런 느낌이 좀 덜 들었을 것도 같습니다만.

결론

이런 게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아쉬운 점들 덕분에 이전만큼 존윅을 맹목적으로 좋아할수는 없게 됐습니다. 여전히 유튜브든 어디든 홈비디오시장에 나오면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일단 산 다음 또 한없이 돌려보기야 하겠습니다만 전작들에 비해 단점이 더 많이 보이고 또 전작들에 비해 충분히 경쾌하지도 않아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물론 이런 단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액션은 낄낄거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병신같지만 멋있고 모로코 전투 같은 부분은 새로운 메커닉의 도입으로 빠르고 신나며 화려한 레벨디자인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병신같음도 남아있고요. 일단 승인이 났다고 하니 이제 잠자코 다음 영화를 기다릴 작정입니다.

스트라바 유료구독 취소 예정

한동안 써 온 스트라바 유료구독을 중단할 작정입니다. 스트라바에 2014년에 가입한 다음 한동안 무료로 사용하다가 유료구독을 시작한지 3년째인데 요즘들어 과연 스트라바 유료서비스가 의미있는 것인지 좀 심각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미 구독연장 옵션을 꺼놨고 이번 구독기간이 끝나면 알아서 무료버전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다시 구독할 의사가 없습니다.

스트라바 유료서비스에서 제공하는 데이터 상당수는 이미 다른 서비스에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령 각 액티비티마다 보여주는 심박통계, 파워커브, 파워분포는 같은 정보를 다른 서비스에서 보여주는 정보입니다. 심박이나 파워는 이걸 측정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ANT+나 블루투스 무선센서와 별도 바이크컴퓨터 헤드유닛을 사용합니다. 더 간단히 이야기하면 심박센서와 파워미터를 달고있다면 어지간하면 가민 헤드유닛 정도는 사용합니다. 그래서 운동 정보를 가민커넥트에 올려놓으면 스트라바에서는 유료로 제공하는 심박통계, 파워커브 데이터를 바로 보여줍니다. 굳이 스트라바에 같은 정보를 표시하기 위해 추가로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퍼스널 히트맵은 재미있는 기능이지만 한국 지도에서 예쁘게 동작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건 한국의 구글지도가 더이상 업데이트되지 않는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한국을 제외한 세계 전체는 지도를 흑백으로 처리하고 그동안 내가 다닌 길을 예쁜 색상으로 눈에 잘 들어오게 표시해주는 반면 한국 지도는 아무 처리도 해주지 않아 내가 다닌 길을 표시하는 색상과 지도 색상이 잘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내 퍼스널 히트맵을 캡처해 어딘가에 올려놓고 싶어도 한국 지도 배경은 정말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내 신체 반응모델을 예측해 현재 어느 정도 수준인지 표시해주는 피트니스 앤 프레시니스 지수는 이게 내 신체를 모델링하려고 시도한 것이 맞긴 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같은 운동을 한 다음 가민 기계에 표시되는 리커버리시간이 100시간일 때 스트라바에 표시되는 피로지수는 다음 48시간 안에 거의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고 표시됩니다. 그래서 스트라바에 표시된 피로지수를 믿고 자전거를 끌고 동네 뒷산에 올라가기 시작하면 평소보다 심박은 10 이상 높고 아직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 신체 반응모델을 제대로 예측해내지 못하는 서비스를 과연 유료로 사용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스트라바는 여러 회사들과 협업해 스타라바 유료 사용자들에게 할인상품이나 보험상품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북미지역 이외에서는 거의 쓸모없을 뿐 아니라 특히 한국에서는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북미지역 이외의 사용자들이 지불한 돈을 가지고 북미지역 사용자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유로 이미 연장을 중단했고 앞으로 몇 달 안에 무료사용자로 복귀할 예정입니다. 유일하게 대시보드에 주간, 월간, 연간 목표를 입력하고 현재 진행상황을 표시하는 유료 기능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걸 위해 연 60달러를 지불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들에겐 맥심 기관총이 있지만 우리에겐 없다네

어쎄신크리드 스토리크리에이터모드를 둘러봤습니다. MMO 게임을 만들면서 항상 골치아픈 문제이던 퀘스트 제작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얻은 경험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이 도구의 어디까지가 개발팀 내부의 환경이고 또 어디까지가 외부에 공개하기 위해 다듬은 환경일지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직접 사용해보지 않을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드리면 (그리고 아마도 어쎄신크리드 오딧세이를 가지고 있는 계정이어야 실행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해봅니다.) 웹에서 어쎄신크리드 오딧세이에서 구동되는 퀘스트를 만드는 도구입니다. 여러 퀘스트를 묶는 단위인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데 각각의 퀘스트에 참여할 인물, 인물들이 배치될 장소, 배치될 조건, 플레이어가 퀘스트를 시작할 조건과 목표, 각 인물들의 시점 별 행동 등을 웹에서 설정한 다음 게임에서 돌려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도구입니다.

시작할 때 이야기했지만 이 도구가 실제 개발환경의 어느정도를 반영한 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가령 이전에 감명깊게 봤던 스카이림 에디터는 개발팀이 사용하는 환경의 대부분을 가져왔다고 추정했습니다. 심지어 초기 버전에서는 실행할 때 내부 개발환경과 다른 환경 때문에 수없이 뜨는 경고메시지를 닫아가며 사용해야 했습니다. 또 실제로 컨텐츠를 추가하는 것 외에도 게임을 거의 다 뜯어고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어쎄신크리드 스토리크리에이터모드는 만들 수 있는 것이 스토리와 퀘스트, 그것도 꽤 제한된 범위의 목표와 기능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목표는 여섯 종류 정도, 캐릭터의 행동 제어도 실제 게임에서 사용한 것에 비해 개수가 적고 또 게임상의 보스를 출연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 사용자들에게 공개된 에디터의 생김새를 뜯어보며 개발팀 내에 있을지도 모르는 철학을 짐작해 보았습니다. 인상깊은 부분이 두 가지 있었고 둘 다 한 가지 철학으로 귀결됩니다. 서로 다른 전문성을 가진 스탭들이 각자 작업의 경계에 해당하는 일을 할 때 상대와 너무 강한 협업을 하지 않도록 하는 부분입니다. 가령 퀘스트 로직을 만드는 사람은 레벨디자이너의 전문성을 요구받지 않습니다. 이미 인물을 배치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이미 월드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위치 중 하나를 선택해 내 퀘스트에 사용할 인물을 배치하고 인물의 행동을 설정하고 플레이어와 인터랙션하는 로직 자체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또 대화를 작성하는 사람은 대화 작성에 집중하면 됩니다. 가령 각 대사를 말할 때 인물이 어떤 감정상태인지를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인물이 어느 위치에 서있을지, 카메라가 어디를 비출지에는 완전히 신경을 끌 수 있습니다. 흔히 이런 게임에서 컷씬은 소위 싼 컷씬과 비싼 컷씬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는 대사를 작성하는 사람이 싼 컷씬을 만드는데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인물의 감정과 대사를 선택하기만 하면 싼 컷씬은 알아서 만들어집니다. 알아서 만들어지는데는 싼 컷씬을 만드는 사람들의 전문성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대사를 작성하는 사람이 거기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문득 제가 게임을 만들면서 일어나는 일과 위 가정을 비교해봤습니다. 제 주변에서는 한 가지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수행하는 작업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전문성을 요구하곤 합니다. 가령 퀘스트 로직을 만드는 사람이 대사도 써야 하고 또 싼 컷씬의 카메라도 잡아야 하는 식입니다. 이들 각각의 작업을 단순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전문성을 요구하는 작업이 뒤섞인 환경에서 작업해야 하는 상황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영역의 작업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거나 서로 다른 전문성을 요구하는 경계의 작업을 하는데 너무 강한 협업을 요구받습니다. 전자의 경우 완성된 게임의 퀄리티가 떨어지고 후자의 경우 스텝을 갈아버립니다. 더 빨리 지치고 더 빨리 인간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이 도구의 존재에 대해 다른 개발자분들과 이야기해보니 예상대로 다들 알고있는 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같은 프렌차이즈 게임을 장기간 개발하면서 서로 다른 프로젝트간에도 서로 남겨줄 것이 있지만 우리의 개발은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면 완전히 헤어졌다가 다시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과 완전히 새로운 프로젝트, 완전히 새로운 회사와 체계, 엔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환경 속에서 처음부터 다시 개발하므로 프로젝트 간에 남겨줄 것이 있더라도 거의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금처럼 개발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개발자 각각의 입장에서 거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간히 공개되는 국외 개발사들의 개발환경을 보며 마치 낮은 난이도로 문명을 플레이할 때 증기기관을 개발하고 동력이 있는 함선을 끌고 저 멀리 대륙 뒤로 돌아갔더니 그쪽에 있는 나라들은 아직도 노를 저어 다가와 창을 던지는 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안타까웠습니다.

현대의 게임은 여전히 제작비용이 올라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이 상황에서 반드시 국외에도 서비스를 해야 하는데 국외에서 서비스하는 회사들과 경쟁하기에 저들에겐 맥심 기관총이 있지만 우리에겐 없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개발해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우울해졌습니다.

· 2019-06-16 19:06

공개 기획서 제작 제안

문제인식

오래 전 제가 작성해야 하는 문서와 똑같은 결과물이 이미 구현된 다른 프로젝트가 있어서 사내 시스템을 통해 문서 열람을 요청했습니다. 분명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거요. 하지만 결재선이 일곱개인 거대한 기안문서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결재선에 있는 여러 사람들은 각자 결재문서를 받을 때마다 바로바로 승인해 주셨지만 결국 2주가 지난 뒤에 문서를 열람할 권한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기안을 올린 날 저녁에 문서를 완성했고 다른 프로젝트의 문서는 열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이 경험 후에는 다시 다른 프로젝트의 문서 열람을 시도하지도 않았고요.

상업용 게임을 개발하면서 다른 프로젝트의 다른 직군 산출물에는 접근할 기회가 있는 반면 게임디자이너들이 주로 작성하는 소위 '기획서'2)에는 접근할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본 공개된 기획서는 주로 게임디자인을 지망하시는 분들이 작성하셔서 범위나 형태가 실제 개발과 맞지 않거나 30년쯤 전에 업계의 전설들이 작성한 지금 환경과는 완전히 맞지 않아 도저히 참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합니다만 모방이라도 해서 유능한 단계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려면 모방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기획서는 이럴 기회가 상대적으로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좁은 범위의 기능을 대상으로 문서를 작성해 공개하고 의견을 받아 고치기를 반복하며 이 과정과 결과를 공개해둔다면 저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좀 어때?

처음에 트윗3)을 올리고 나서 다행히도 여러 의견을 보게 됐습니다. 아무 관심도 못 받고 그냥 지나갈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의견 중 일부는 뭔가 거창한 것을 시작하려는 의도로 해석하신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작은 문서를 공개하고 아주 작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망한 게임이든 흥한 게임이든 작은 UI로 된 메커닉은 있을테고 그걸로 작은 기획서를 쓸 수 있을 겁니다. 그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보잘것 없는 물건이면 좀 어떤가요.

기획서를 공개된 장소에 작성하는 것은 마치 사람으로 가득한 광장에서 용변을 보는 것 같은 불편한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사실 아무것도 안하면 쉽고 편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경험에 기대 아주 느리게 발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차라리 광장에서 수모를 겪으며 앞으로 나가는 쪽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 저 사람은 겨우 저 정도 수준이구나' 하고 알려지는 것이 여전히 두렵기는 합니다만 그럼 좀 어떤가요.

요약

게임디자이너들이 매일매일의 작은 업무에 참고할만한 저작권으로부터 안전한 좁은 범위의 기획서를 만들어 공개하고 개선한다.

목표

  • 개인적으로는:
    • 같은 프로젝트에서 일하는 사람 말고 외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문서를 고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 다른분들께는:
    • 제 기준으로 현업에서 사용하는 것에 가까운 형식의 공개된 문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 의견을 낼 수 있고 직접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 (직접 수정하는 부분이 잘 동작할 거라고 예상하지는 않습니다.)

방법

기획서의 형태

보조시스템 기획서

'게임디자인문서' 혹은 '게임기획서'라고만 적어놓으면 범위가 넓어 온갖 문서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팀이나 프로젝트에 따라 정말 온갖 종류의 문서가 이 범위에 포함될 겁니다. 이 범위를 좁혀야 실제로 문서를 작성할 수 있고 예상할 수 있는 문제를 줄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일단은 '보조시스템 기획서'를 작성해 보려고 합니다.

보조시스템 기획서는 게임마다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소위 '뻔한' 구성요소를 설명한 문서입니다. 가령 모바일 MMO 게임이라면 화면 상의 비슷한 위치에 캐릭터 정보가 표시되고 비슷한 위치에 메인메뉴가 있습니다. 또 화면 전체를 덮는 캐릭터정보 화면이나 인벤토리 화면이 있습니다. 이들은 게임의 핵심 메커닉 - 흔히 '전투시스템'이라고 부르곤 하는 - 과 거리가 있지만 작성하기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고 접근하기도 쉽기 때문에 개선 의견을 받을 여지도 더 많습니다.

때문에 '보조시스템 기획서'를 위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역기획서

굳이 문서가 아니더라도 회사에서 업무시간에 업무용 장비를 가지고 하는 모든 작업 결과물은 회사의 소유입니다. 때문에 회사의 그 어떤 작업도 회사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회사가 승인하는 범위를 초과해서 이동하거나 공개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실제 작업에 사용하는 문서는 '절대로' 공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획자가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역기획서를 작성하는 겁니다. 이미 출시된 게임의 일부분을 개발한다고 가정하고 역기획서를 작성하면 이 문서는 방금 이야기한 몇 가지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미 공개된 게임의 보조시스템 중 일부를 짧은 개발기간 내에 개발한다고 가정하고 역기획서를 작성해 공개하는 식으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좁은 범위의 기능을 대상으로

기획서는 여러 가지 범위를 대상으로 작성할 수 있습니다. 가령 전투 시스템 기획서처럼 굉장히 넓은 범위를 대상으로 작성해 거대하게 만들 수도 있고 파티장에게 추방 권한 추가와 같이 이미 완성된 시스템에 기능을 추가하기 위한 짧은 문서를 작성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뒤쪽에 가까운 문서를 위주로 작성하려고 합니다. 이미 출시된 게임의 특정 시스템을 대상으로 '역기획서'를 작성하고 이 시스템의 일부를 개선할 목적으로 기존 문서를 수정하거나 작은 문서를 수정하는 과정을 보일 겁니다.

운영

  • 현재 위 주소에서 작성을 시작했습니다.
    • 이슈에 의견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후 진행

계획

  1. 이 페이지를 공개하고 의견을 받아 계획을 완성합니다.
  2. 솔루션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해 사이트를 구축합니다.
  3. 시험 삼아 아주 좁은 범위의 기획서 몇 개를 작성합니다. (여기 진행중)
  4. 사이트를 공개합니다.
  5. 의견을 받아 수정하기 시작합니다.
    •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현재 진행상황

  • 아주 좁은 범위의 기획서를 써보고 있는데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범위가 좁은 + 기반이 아닌 문서를 작성하다 보니 문서 중간에 갑자기 뜬금없는 기반설명을 해야 해서 난감하긴 합니다만 문서가 쌓이면 완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FAQ

게임디자인이 문서만으로 진행되는건 아니잖아요?

상업 개발팀의 현실을 생각해봤습니다. 업무를 문서만으로 진행할 수 없는 형태로 고정하고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 재현이 어려운 방법을 제시하곤 합니다. 이런 방법들은 대체로 훌륭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그렇게 일하지는 않습니다. 매 업무마다 거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러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실제 업무는 문서로 시작하고 끝나지 않을 수 있지만 문서로부터 시작되고 문서에 의해 총 의사소통비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게임디자이너는 게임디자인과 개발진 업무가 핵심이고 일상의 의사소통수단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문서입니다. 유효한 문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예측되지 않은 불필요한 의사소통비용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기획서는 쓰는 사람마다, 프로젝트마다 다릅니다만

맞습니다. 쓰는 사람마다 다르고 프로젝트마다 다르고 또 종종 회사마다 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현상을 관측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생기는 의사소통비용의 낭비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게임디자인 직군의 산출물 이외에는 어느 정도 표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정 엔진을 사용하면서 리소스 구성이나 구현 방법은 어떤 형태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덕분에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더라도 이전에 사용해본 엔진을 사용한다면 많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표준화되어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기획서가 상황에 따른 표준화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덮어놓고 이야기하기에는 기획서 역시 다른 산출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문서가 프로젝트마다 아주 많이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택한 솔루션은 슬라이드를 배제하고 있는데요

제 관점에서 슬라이드는 형식 중 하나입니다. 문서의 본질과는 차이가 있고요. 문서는 표준 용지에 인쇄할 수 있는 형식이거나 아래로 계속해서 스크롤할 수 있는 형식이거나 또 한장씩 넘겨가며 보는 슬라이드 형식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텍스트와 테이블, 이미지로 구성된 '형식'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런 문서는 또 다른 '형식'인 슬라이드 형태로도 표현할 여지가 있으며 그건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할 수도 있습니다.

<< 새 항목 | 오래된 항목 >>

2)
게임디자인문서 혹은 게임디자인도큐먼트라고도 부르는 것 같지만 여기서는 좀더 클래식한 뉘앙스를 담아 '기획서'라고 부르겠습니다.
blog/start.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9-04-08 20:32 저자 neooc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