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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whagyebusterminal

화개 터미널 버스 예약 경험

(2016년 5월 1일)

이야기는 지난달 초 섬진강에 갔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첫째 날은 조금 힘들었지만 뜻하지 않게 구례에서 굉장한 벚꽃길을 만났을 뿐 아니라 순천시에 들어가자마자 만난 신성치킨에서 말도 안되게 맛있는 치킨을 먹으며 하루 동안에 힘들었던 모든 일이 한 번에 사라져버린 직후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예상보다 컨디션이 훨씬 좋은 상태였고 광양까지는 70킬로미터도 채 안 남았기 때문에 느긋하게 경치 구경하며 가면 아직 날이 밝을 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다만 오전에서 정오로 가는 그 즈음에 비가 올 수 있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사실 기상청의 예보는 생각보다 더 잘 적중한다고 합니다. 늘 기상청의 예보가 틀린다고 느끼는 이유는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령 비 예보가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비가 안 올 것 같아서 우산 없이 나갔다가 비가 안 오면 ‘거봐 비 안오잖아!’가 되고 예보대로 비가 오면 ‘아 뭐야! 맞잖아!’가 되는 식입니다. 당시 둘째날 아침에 가장 효율적이고 이성적이었을 판단은 다음 날 진행을 포기하고 숙소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구례 터미널에서 일정을 마무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날 아침 하늘은 흐릴 뿐 아직 비가 뿌릴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숙소 북쪽에 있던 터미널 대신 숙소 동쪽의 순천시를 향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화개에 다다르기 몇 킬로미터 전부터 비가 본격적으로 뿌리기 시작했고 화개에 도착할 즈음에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수준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올 것에 대비하지 않은 상태라 그대로 강행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그 자리에서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행히도 가까이에 화개 버스터미널이 있었습니다. 주륵주륵 내리는 비를 맞으며, 벚꽂 구경 온 수많은 우산 쓴 사람들과 자동차 사이를 달려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버스 요금

화개 터미널은 그냥 지나가기 딱 좋은 모양새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달에 갔던 대진터미널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갈 수 있는 곳은 대략 서울 남부, 부산, 그리고 지역 내 몇몇 소도시들 정도입니다. 일단 서울 근처에만 도착하면 집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아 서울 남부터미널에 가는 표를 구입하려고 했습니다. 오전 10시에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다음 차는 오후 4시에 있었고 딱히 대안이 없었으므로 출발까지 여섯 시간 남은 표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여기부터입니다. 석 장을 구입하는데 대략 6만 얼마 정도가 필요했는데 현금이 부족했습니다. 통장에 입금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돈을 보냈습니다. 이미 전날에도 토스 앱을 사용해서 모텔에 마지막 남은 방 하나를 예약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은 터라 이번에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보내고 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매 업무를 보시던 할머니께서는 입금 확인을 직접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사실 이건 스프링노트에 수기로 남기는 예매시스템을 본 순간부터 예상했어야 합니다. 아. 설명을 빠뜨렸는데 화개 터미널의 예약시스템은 노트와 볼펜을 이용합니다. 그나마 노트 곳곳에 산발적으로 예매 내역과 남은 좌석 현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비관계자인 저로써는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숫자와 문자, 선 따위가 어지럽게 널린 노트를 내려다보시고는 세 자리가 있다고 알려주신 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입금 확인은 통장을 은행에 가지고 가서 통장정리를 해야만 알 수 있었고 이 날은 일요일이었으며 비를 피해 터미널로 몰려와 버스 시간을 묻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이 분께서 입금확인을 하는 방법은 무려 입금한 사람의 핸드폰에 찍히는 ‘입금 확인 문자’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폰뱅킹을 사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가끔 부동산에서 집을 계약할 때 집주인이 사용하는 것을 봤는데 아무리 안 보려고 해도 보이는 계좌비밀번호, 아무리 안 들으려고 해도 들리는 입금현황 덕분에 이 멍청한 수단을 사용할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이 방법으로 입금한 입금 확인 문자를 보여달라는 겁니다. 토스 앱의 입금 확인 메시지를 보여줘도 당연히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가 보인 화면을 보고선 ‘그건 당신이 조작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고 멍해졌습니다. ‘아니 문자는 더 조작하기 쉽다고’라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어쨌든 사자후 스킬을 사용해 강력 항의한 다음에야 제 전화번호를 남기고 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서는 삼성페이고 나발이고 현금페이가 최고이긴 했지만 이 정도를 예상하지는 못했습니다.

현실

사실 대중교통 구입, 숙소 예약 등은 어지간하면 온라인으로 처리합니다. 당연히 지불도 신용카드로 해결하고요. 지방으로 갈수록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많아 현금을 찾아 다니기는 하지만 종종 현금이 부족할 때 계좌이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점점 신용카드 결제 뿐 아니라 핸드폰을 들이대면 결제되는 시스템을 채용하고 온라인으로 구입할 수 없는 물건이 거의 없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세상에서는 여전히 수기로 예매를 처리합니다. 당연히 서울 넘부 터미널에서 화개까지 가는 버스편은 실제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온라인 예약시스템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예약은 현금으로만 하고 계좌이체를 확인할 방법조차 없었습니다. 한쪽은 한없이 미래로 달려가는 반면 다른 한쪽은 영원히 현재에 남아 알 수 없는 핸드폰 화면을 들이대며 입금했는데 어쩔거냐고 소리치는 아저씨를 상대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지방에서 장거리 라이딩을 할 때는 비슷한 방식을 사용할 겁니다. 현금을 약간 찾아 다니고 숙박처럼 액수가 커질 때는 계좌이체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계좌이체조차도 통하지 않는 구매가 아직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다닐 작정입니다.

부록: 여섯 시간 보내기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습니다. 오전 열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오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처음에는 근처에 예쁜 카페에 들어가 차와 케이크를 두어번 시켜먹으며 좀 쉬었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그 근방에 있는 숙소를 대실했는데 이 경험이 꽤 좋았습니다. 온통 비에 맞은 채로 들어가서 말릴 수 있는 것은 말리고 샤워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누워서 쉬다가 다시 터미널로 돌아가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느 자전거 여행자들과는 달리 저는 짐을 늘리더라도 일상복을 챙겨 다닙니다. 그러면 숙소 근처를 놀러 돌아다니기 좋거든요. 여튼 앞으로도 무겁지만 일상복을 챙기고 낮에 힘들면 숙소를 대실할 작정입니다. :)

blog/whagyebusterminal.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7-10-09 21:33 저자 neoocean